카테고리 없음

얼음!순간들

Neon Fossel 2020. 5. 15. 10:37

1-2주에 한 번, 같이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을 보고 오면, 항상 밤 열두시 언저리. 버스를 내려 집 방향으로 건너가는 구름다리 위. 같이 걷는게 좋았다.

- (살짝 투덜대며)근데 좀 천천히 걸으면 안 돼?
- 왜?
- 빨리 걸으면 집에 빨리 도착하잖아.
- ...?!...”..”..”

Note : 어떻게 저런 소리를 할 수 있었을까. 참 뻔뻔하고 발칙한 놈이다.



같은 밴드에, 피아노를 치는 그 여자와 어릴 때부터 친남매처럼 지내는 기타리스트 형이 있었다. 그들 부모님들끼리도 꽤 친해서, 이제 둘 다 컸으니 자꾸 둘이 따로 만나서 밥이라도 먹어보라는 얘기가 나왔고, 거절도 몇 년이 넘어가니 난감해서 어쨌든 한 번은 건성으로라도 해치워야 한다고 했다. 어쩔수 없었다. 난 아직 남자친구가 아니니까. 내가 뭐라고 할거야, 거기다 대고.

마침 내가 핸드폰을 새로 산 날이었다. 2년에 한 번은 무조건 행복해지는 날이다.

무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짜증이 났다.

괜찮으니 잘 다녀오라고, 그렇게 말했으면서. 안 괜찮은데. 괜히 쿨한척 잘 다녀오라는 쓸데없는 말이나 해놓고 안달복달이다. 새로 산 폰으로 문자가 온다.

- 지금 밥집 도착했어.
- 응. 맛있게 먹어. 잼나게 얘기하구.

- 집에 왔어.
- ? 벌써?
- 응. 자꾸 영화도 보자는데, 영화는 이미 다 본거 밖에 없다구 하고 안갔어.
- 그래도 밥먹고 카페 가서 얘기만 해도 훨씬 더 걸릴줄 알았는데.
- 얘기도 완전 재미없었어. 기타가 어떻다는둥, 일본 밴드 누구를 좋아한다느니, 티비 예능은 뭐가 재밌다느니 그러는데, 지루해 죽을뻔. 우리끼리 얘기하면 시간가는줄 모르는데. 그치이 ㅎㅎ
- 아니, 뭐, 난 그래도 한 열 시는 돼야 집에 들어갈 줄 알았어.
- 내가 왜 외간남자랑 서너시간씩 있니? 바보.
- ... 나도 외간남자 아니야?
- 넌 아니지. 왜, 외간남자 하고싶어?
- 아니.

...

... ㅎ

... ... ㅎㅎㅎㅎㅎㅎㅎㅎ

...

나 아닌 다른 모두를 ‘외간남자’라고 선을 그어버렸다.

...

나는 외간남자가 ‘아닌’ 남자다.

...

외간남자, 외간남자가 아니다, 외간남자, 외간남자가 아니다

...

어느 선선한 날, 소파에 드러누운채로 끙끙 앓고 있던, 저녁 9시 45분쯤의 대화. 스스로 느끼기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빙구같이 웃었다.

외간남자가 아닌 남자다.

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