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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시작

Neon Fossel 2020. 1. 24. 21:07

직장썰 연재_1

'to be continued...'의 강력함과 감질남을 잘 알기에, 말을 하다 마는 걸 굉장히 싫어하지만 어쩔수없이 끊었다.

 

꼭 가고싶은 회사였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경영 전공자들은 흔히 백오피스라고 불리는 ‘관리직’이니까, 아무 회사를 가도 하는 일은 다 비슷해서 크게 상관없을거라고 생각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실제로 어떤 회사를 가든 큰 틀에선 하는 일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회사의 메인비지니스 자체나 혹은 비지니스모델이 본인이 관심이 없거나 싫어하는 일이라면, 업무에 대한 이해나 적응, 애착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다. 사람으로 치면 관심 있는 사람한텐 눈길 한번이라도 더 가는 것을 상상하면 된다. 거기에 더해서 같은 관리직이어도 굳이 경영 전공을 할 필요가 없는 부서이거나, 혹은 그런 업무만을 맡게 되는 직무가 있다. 어느 회사에서나 다 할 수 있는 ‘그런 관리직’으로만 일하면, 말 그대로 커리어랄게 딱히 없어서 수명이 길지도 않고 몸값도 잘 오르지 않는다. 반대로 같은 관리직이어도 회사나 직무에 대한 이해와 프로세스 혁신 등, 일상적인 오퍼레이션 이상의 퍼포먼스를 확실히 보이면, 그 자체가 전문성이 되어 제대로 된 커리어를 쌓을 수 있다. 이럴 경우, 같은 관리직이어도 전공 역량이 필요하다.

 

전문 석공인 아버지와, 비슷한 일을 하는 고모들, 목조건축 인간문화재인 큰아버지를 어릴때부터 봐왔다. 그래서 집이라는 공간을 이리저리 주무르는 인테리어 전반을 남의 손을 빌려서 하는 것을 거의 못 보고 자랐다. 내 진로와 관계는 딱히 없지만, 별로 어렵지 않으면서도 재미있어보이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수 년, 수십 년, 혹은 평생을 보낼 공간을 의미와 가치있게 만든다는 일은 꽤나 매력적이기까지 했다. 비슷한 정도로 관심있던 다른 몇몇 분야의 회사에 지원하고, 이런저런 단계에서 탈락하거나 전형이 진행중인 상태에서 ‘그 회사’의 공채 공고를 봤다. 가고싶은 회사이긴 한데, 이렇게 적당한 규모의 회사가 무려 경영지원직무를 뽑으면 나같은 10만 문돌이들이 떼로 몰려들테니 떨어질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지원하고 3주쯤 지났을 무렵, 서류가 합격됐다는 메일이 왔다. 의외였다. 다른때와 마찬가지로 취준 카페에서 1차 합격자끼리 모이는 면접 스터디에 들어갔다. 메일주소와 카톡 아이디를 주고받고, 단톡방에 들어가고 며칠이 지나서 강남의 한 스터디룸에 모였다.

 

여섯명 쯤 모여보니 지원분야가 다양했다. 마케팅, 영업관리, 디자인, 설계, 재무, 인사 등등. 한 주 동안 여러개의 사업부를 나눠서 맡거나 본인이 지원한 분야에 대한 리서치를 해서 공유하고, 주 1-2회쯤 만나서 인성면접과 직무면접을 서로에게 모의로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다른 분야는 스터디 내에 겹치는 지원자가 없는데, 하필 내가 지원한 재무는 스터디 안에 나 말고 한 명이 더 있단다. 안 그래도 인원 적게 뽑는 직무로 유명한데, 무려 면접스터디에서부터 경쟁자가 있다니. 심지어 그 사람은 첫 주엔 사정이 있다고 참석을 못했다. 간보기도 실패. 둘째 주가 되었다. 그 사람은 일하면서 준비중인데, 퇴근이 늦었다며 헐레벌떡 들어왔다. 살짝 마르고 하얗고 눈이 큰 여자였다. 재무쪽 지원자들은 대부분 재무계산기나 엑셀처럼 생겨서(...) 서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으니까, 마음속에서라도 살벌하게 상대를 이겨먹기 위한 고민을 하기 쉽다. 근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여리여리하고 착하게 생긴거지, 불편하게.

 

내가 지난 두 주 동안 재무쪽에서 리서치한 자료를 톡방에서 봤다며, 그런걸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다. 지난주에 스터디 멤버들이 처음 보인 반응과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뉘앙스가 다르다. 얘기를 들어보니, 지금 지원하는 ‘그 회사’에서 이미 계약직으로 일을 하고있는 사람이 공채로 다시 지원한 거였다. 다른 모르는 회사에서 한 인턴경험이라도 들이밀려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무려 지원하는 회사에서 이미 일하는 사람은 꽤나 앞선 것과 다름없다. 그러면서도 자꾸 나한테 ‘안에서 일하는 본인도 모르는 회사 얘기를 어떻게 아느냐’며 연신 신기하다는 반응이다. 부럽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다. 일부러 약올리나. 그래도 함부로 미워할 수만은 없게 생겼다. 툭 치면 쓰러질것처럼 말라서는, 본인은 말단에서 일만 하니까 오히려 이런 준비가 하나도 안 된건 아니냐면서 큰 눈이 쏟아질 것처럼 그렁그렁하다. 나도 마음이 약해빠졌던거다. 스터디 중간중간, 모임이 없는 날도 이런저런 자료공유를 이유로 얘기를 주고받았다.

 

다른 직군도 비슷할지 모르지만, 재무쪽을 지원하던 나와 학교 선후배들의 리서치 채널은 이랬다.

 

AR(Annual Report) : 체감상 중견기업 이상 규모의 회사는 회사 사이트에 25-40페이지 정도의 pdf파일로 매년의 사업결과와 사업계획, 회사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와 재무정보까지 담아서 매거진식으로 발행한다. 양이 굉장히 방대하다. 회사에서 직접 뽑아낸 ‘백서’같은 것이다.

 

IR(Investor Relation) 자료 : 주주총회 현장 혹은 잠재적 투자자에게 IR부서(재무 혹은 자금팀에 포함된 경우도 있다)가 어필하는 ppt자료이다. 기간으로는 AR보다 세분화된 기간의 이슈를 디테일하게 볼 수 있고, 내용은 아무래도 프리젠테이션을 염두에 두고 만든 자료라서 핵심만 컴팩트하게 구성되어 있다. 주로 분기별로 있으며, 역시나 회사 사이트에서 구할 수 있다. AR과 보완적으로 교차해서 보면 좋다.

 

증권사 리포트 : 각 증권사에서 해당 기업을 검색해서도 찾을 수 있겠지만, 그러면 증권사 각각의 사이트나 플랫폼을 따로 뒤져야해서 효율성이 떨어진다. 구글에서 filetype을 잡아주고 돌리면, 분기단위로 증권사의 애널리스트나 그 밑의 RA(보조 조사원)가 작성한 해당 기업의 리포트가 검색된다. AR과 IR을 꼼꼼하게 봤다면, 회사 자체에 대한 데이터나 이슈는 그닥 새로울 게 없다. 다만 AR, IR이 회사 스스로가 보여주고 싶은 내부적 관점에서의 어필이라면, 증권사 리포트는 경제 전반의 주요변수와 해당 업계의 업황까지 고려한, ‘외부인’ 입장에서의 다소 객관적인 투자매력도를 논증하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그 회사의 ‘아픈 곳(혹은 다른 말로 구린 구석…)’을 가장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리포트를 작성하는 증권사(직원) 입장에서도, 해당 기업과의 관계를 아예 무시할 순 없기때문에, 특히 후한 평가나 장밋빛 전망일수록 덮어놓고 믿을수는 없다.

 

DART(전자공시시스템, 재무제표) : 회계법인에게 감사를 받는 모든 기업의 재무제표는 당연히 중앙집중된 온라인 사이트에서 누구나 접근이 가능하다. 회사의 전체적인 개요를 알고 싶으면 AR과 비슷하게 연차보고서를 보면 된다. 흔히들 재무제표라고 하면 숫자만 잔뜩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앞뒤로 ‘사업의 개요’, ‘주석’페이지를 잘 보면, 사업의 전반적인 내용이나 외부에서 안 좋게 볼만한 시그널을 어떻게 인지하며 관리하고 있는지를 상세하게 서술해놨다. 여기서 굳이 전공의 엣지를 세우자면 살짝 엑셀을 만질 일이 생긴다. 동종업계의 자산이나 매출규모가 비슷한 3-7개 기업의 각 재무지표의 업계평균값을 구하고, 해당 기업이 그에 비해서 오버나 언더값들을 가지고 있으면 그 이유를 역추적하는 것이다. 자산 중 현금 보유비율이 낮으면, 여기는 원래 현금자산을 가만두지 않고 자꾸 다른 자산으로 굴리는 회사이거나, 최근에 대규모 사업투자 지출 등 총알이 필요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이자보상배율이 현저히 낮으면, 영업이익이 낮을수도 있고, 그렇다면 마케팅 비용이나 매출원가쪽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만약 버는 영업이익이 줄진 않았다면 쓰는 이자비용이 늘었다는 것이고, 그럼 회사에서 굳이 빚을 땡기더라도 중단기 내에 신규투자 계획이 있다는 시그널일 수 있다. 이미 이런 대부분의 과정은 포탈사이트 증권 섹션이나 증권사 리포트에서 거의 다 분석해놨다. 대신 그런 곳에 없는, 본인이 직접 분석한 참신한 내용을 들고가고 싶거나, 회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재무적 관점에서 스스로 소화하거나 이해하고 싶을 때, ‘많이’ 번거롭지만 좋은 방법이다. 이때 포착한 몇몇 중요한 흐름만을 구체적인 규모나 금액으로 기억하고, 나머지는 회사 규모에 따라 50억-100억 단위로 잘라서 러프하게 머리에 넣고 면접에 간다.

 

‘세상에 100명의 사람이 산다면’ 느낌의 거친 예를 들면 이렇다. 총자산 1000억짜리 살림을 하는 회사인데, 400억은 은행 빚이고 600억은 주식으로 땡겨서 부었다. 그 1000억 자산중에 200억 정도는 현금이나 외상매출채권으로 들고 있고, 500억 정도는 영업자산에 넣고 돌린다. 나머지 300억 정도는 그냥 돈 자체를 굴리기 위한 금융투자나 토지, 건물 등에 들어가있다. 그 자산들로 벌어들인 매출은 연 2000억인데, 매출원가와 판매비&관리비를 제외한 영업이익은 200억이다, 마진율(영업이익률) 10퍼센트 정도의 장사를 한다. 매출 원가를 가장 많이 잡아먹는 요소는 무엇이고, 그 요소는 어떤 특정 국가나 공급자 혹은 시장지표에 민감하게 연동되어 영향을 받는다. 이자비용이나 법인세는 대략 80억정도를 지출하며, 최근 채무불이행이나 체납 등의 이슈는 없다. 이 회사의 회사채 신용도는 AA다. 다 떼고 남은 순이익은 100억이고, 그 중 주주들에게는 1.5퍼센트를 배당한다. 지분율 기준 주요 5대 주주(개인이 아니라 기관이나 회사인 경우가 더 많다)는 누구이고, 이들의 투자 목적이나 성향, 예상 투자기간은 어떠하다. 재무상태표(자산,부채,자본=주식)와 손익계산서(매출,각종 비용 등)를 마치 사람 몸에서 혈액이 순환하듯, 자본의 투입 - 생산(영업활동) - 분배 - 재투자 라는 스토리 혹은 흐름으로 엮어서 훑는 방식이다. 이 흐름의 어딘가가 불편하면, 기업엔 장/단기적으로 문제가 생긴다. 돈을 끌어오는게 문제거나, 끌어온 돈을 대학생이 공모전으로만 분석해봐도 망할 게 뻔한 사업에 쓰거나(경영진이 독선이나 관성에 사로잡혀서 비합리적이면 은근히 흔하게 발생한다), 부지불식간에 잘못된 시스템 때문에 돈이 새는게 문제거나, 잘 썼는데도 못 버는게 문제거나, 투자자들이 단기적으로 먹튀만 하려고 하거나, 주주들이 경영 전략이나 회사 지배구조를 불합리하게 쥐고 흔든다던가. 그런 부분을 늦지 않거나 미리 진단하고, 담당 사업부나 전방 부서에게 어떤식으로 해결하라는 청사진을 주고, 그대로 하고 있는지 모니터링해야한다.

 

뉴스 : 포탈에서 기업 이름을 검색하는 방식은 결과도 제한적이고 오히려 불필요한데도 중복인 정보가 많다. 뉴스만을 중앙에서 따로 취급하는 준정부기관이 있다. 거기서 거의 황색신문이다 싶은 인터넷신문 몇 개를 걸러내고, 주요매체에서 3년 전 시점까지 월단위로 훑는다. 어차피 앞의 자료를 모두 소화했으면, 대강의 기사는 키워드로만 정리하고 넘어가면 된다. 필요할 때만 전문을 읽는다.

 

대략 이런 내용들을 공유하며, 알려주며 스터디를 진행했다. 나 아닌 그 다른 재무 지원자는 회사 내의 지극히 실무적인 ‘언어’를 나에게 알려줬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상대는 막막하게 느낄만한 사정이긴 했다. 본인도 이미 ‘그 회사’ 회계팀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며, 실질적으로 자금의 유입/지출에 대한 결제나 보고용 자료정리 등은 하는데, 그래서 그게 ‘괜찮은 상태인지, 앞으로 어때야 하는지’는 본인의 몫이 아닌, 공채급 직원들의 일이라서 딱히 본인에게 기대하거나 시키지도 않고, 알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재무나 회계쪽을 복수전공하긴 했지만 딱히 깊게 파고든 건 아니라서 저런 데이터를 어디서 구하고, 어떻게 해석해서, 어떻게 하겠다고 말해야 할지 잘 몰랐단다. 어차피 서로의 스토리나 세부 직무도 약간씩 다르니, 남 가르치는게 가장 공부 잘 되는 방법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