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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썰_공장_00

Neon Fossel 2020. 2. 25. 03:16

나의 와생 첫 레이드는 군단 살게라스의 무덤 공찾이었다. 인여캐 냉법을 퀘스트로 렙업만 하다가 떡하니 만렙이 되었고, 그 이후로는 쐐기가 뭔지, 전설이나 티어는 뭔지 하나도 몰랐다. 그러다 20-30명이 떼로 보스를 패서 잡는 레이드라는게 있다는 걸 알게됐다. 공격대 구하는 메뉴를 눌러봤다. ‘착유경 920/40+노손팟, N3 T10, WCL 85+, 근딜풀, 탱1 원5 힐2(운회x)’. 이건 도대체 무슨말인가. 어딘가 낯선 곳에 빠르게 적응하는게 특기인 나는 역으로 생각했다. 내가 아직 저 용어들을 추측마저도 하지 못할 만큼 친숙하지 않다는 건, 저기에 내가 갈 시기나 준비가 아직 안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라고. 근데 공격대 찾기 메뉴를 보니 같은 레이드의 낮은 난이도는 그냥 아무나 막 갈 수 있는 거였다.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신청을 눌렀다. 템렙이 안된다고 신청 자체가 막혔다. 전역퀘에서 내 것보다 높은 장비를 주는 퀘스트들을 급하게 썰면서 어거지로 템렙을 맞췄다. 그리고 다시 신청을 눌렀다. 한 20분쯤 멍때렸을까. 빠바밤- 소리와 함께 무려 입장하기 버튼이 떴다. 오오 신기하다. 나도 이 패싸움에 끼는건가 드디어.

 

입장해보니 쫄이 몇마리 있었고, 잡고 나서 앞을 보니 집체만한 괴물이 서있다. 저게 보스인가보군. 퀘스트를 하면서 ‘버프가 뜨면 얼창을 쏜다, 캐릭을 세게 만들어주는 애들(쿨기)은 쿨 올때마다 돌린다, 할 거 없으면 얼음화살, 아프면 얼음땡’ 이정도는 이제 충분히 숙지했다. 까짓거 신나게 패면 남들만큼은 딜이 나오겠지. 이미 60렙쯤에 답답함과 궁금함을 찾지 못하고 데빌이라는 통합 애드온을 쓰면서 거기에 딸린 미터기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쪼렙 렙업 인던에서는 나도 미터기 찢었다 이말이야. 그러고 보스를 때렸다. 뭘 같이 맞고 바닥을 밟아주고, 나가서 깔고, 기둥을 깨고, 피했다가 나와서 딜하라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다. 미터기는 힐러랑 비비고 있었다. 그래도 재미는 있고,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거 다 피하고 움직이면서 저 딜을 어떻게 하는 거지.

 

그렇게 공찾을 한바퀴 돌고나서 레이드에 대한 흥미와 오기(...)가 생겼다. 내가 재밌고 좋아하는 걸 ‘잘 못한다’는 상태는 참을 수 없다. 나는 타고난 천재이거나 항상 1등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못 하는 사람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으니까. 와우를 알려준 후배녀석에게 레이드 파티에 끼려면 뭘 알아야 하는지, 뭘 준비해가야 하는지 물었다. 다 설명할 필요는 없고, 정보의 출처만 내놓으라고 했다. 정보는 내 방식대로 소화하는게 빠르고, 간혹 느리더라도 그래야 내 것이 되며, 그래야 이후에 다른 정보가 필요해도 의지하지 않고 알아서 찾을 수 있는 자유도와 능력을 기를 수 있다. 그래서 레이드 전체 가이드, 레이드 준비 가이드, 법사 직업게시판 가이드 등을 독파했다. 세상에. 이렇게 현실세계와 비슷하도록 스펙따라 클래스를 나누는 것도 있으며, 준비물은 또 뭐이리 짜잘하게 복잡하고, 게다가 캐릭터의 딜사이클이라는게 콤보처럼 최적해가 정해져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게다가 레이드 공략 글은 흡사 논문같았다. 신경쓸 게 많아서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이 디테일한 세계가 재밌었다.

 

일주일간 칼을 갈며 머릿속으로 상상의 레이드를 했다. 그리고 초보자였던 내가 구하기 어려웠던 레이드 준비물들을 이리저리 구해서 소중하게 조금씩이라도 쟁였다. 영약 세 개, 물약 30개, 음식 15개. 죽으면 이 아까운게 날아가. 큰일나. 그리고 대망의 리셋날. 파티창을 봤다. 근데 난 경험이 없는 신입인데, 경험자를 찾는 파티만 있었다. 일주일간 글과 손으로 두근거리며 준비했지만, 한 열 개 정도의 파티에 거절당하며 갈 수 있는데가 없다는 사실에 살짝 실망하고 좌절했다. 그럼 처음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라는 말이지.

 

당시 내가 와생 처음으로 들었던 길드는, 와우를 소개해준 후배 녀석 따라 들어갔던 길드다. 한 때 얼라이언스 대표 길드로 지정돼서 밀물처럼 사람들이 훅 들어왔다가, 기존 길드원들은 염증을 느끼고 떠났고, 그 대표 길드로 지정된 시즌이 끝나자 철새들도 다같이 빠져서, 이제는 원로만 몇 몇 남은 껍데기나 시체같은 길드였다. 물론 이런 상황판단도 나중에서야 하게된 것이다. 그냥 사람이 많았다가 요즘은 별로 없는 소소한 길드인줄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길드레이드도 없어진지 오래였고. 길레에서 배우거나 학원팟을 가야된다는 조언에서, 일단 길레는 기각. 그럼 학원팟은 어떻게 가?. 누가 짜면 가란다. 근데 나중에야 알았지만 세기말이다보니 학원팟은 일주일에 몇 개 나오지도 않는 시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설레는 마음으로 레이드 준비를 제 힘으로 뿌듯하게 해놓고도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일요일 저녁, 익숙해진 실망을 미리 가득 담고 파티창을 보고 있었다. ‘살게 영웅 학원팟, 초행 가능, 910/38’. 무려 초행 가능, 무려 내 템렙과 유물력에 맞는 컷, 그리고 어디에도 없는 그놈의 로그 컷 언급. 수강신청보다 떨리는 마음으로 세부사항을 썼다. ‘913/39, 초행이지만 공찾 올킬, 가이드 영상 스무번 봤습니다’. 그리고 영원같은 몇 분이 지나서 무려 초대가 왔다. 세상에. 무작 인스 시스템이 매칭해주는 게 아닌, 사람한테 직접 받는 첫 공초였다. 와 이렇게 들어가는거구나. 왕관표시가 있는 저 죽기 탱커가 공장인가. 촉수현. 설마 촉씨인가. 그냥 마치 실제 인물 비슷한 가명을 지었나보다. 신기하네. 디스코드를 들어오란다. 훗, 이것도 이미 가이드 보고 다 세팅해놨다. 디코를 들어가니 공대장이 말을 한다. 구인 거의 다 됐으니까 슬슬 준비하고 출발하자고. 스마트하고 젠틀하며 젊은 남자 목소리다. 나는 남자를 연애의 대상으로 좋아하진 않지만, 동성 친구라도 입에 걸레를 문 마초나 무뢰배같은 미친놈보다는 스마트하고 젠틀하며 적당히 짖궂은 유머감각이 있는 친구들을 인간적으로 좋아한다. 실제로 내 친구들도 모두는 아니지만 대부분이 그렇고. 무튼 착하고 똑똑한 공장인 것 같다. 다행이군.

 

일주일이 넘게 레이드 게시판을 눈팅하면서, 이미 이쪽의 생태는 어느정도 파악했다. 고여서 잘하는 사람들끼리 가면 빠르고 쾌적하고, 못 하는 아무사람들을 모은 파티는 엄청 오래 고생하면서 심지어 다 못잡고 끝날수도 있다고. 현실과 똑같다. 후발주자가 치고 올라가기 위해 처음으로 마주하는 밑바닥은 항상 누추하고 고생스러운 거겠지. 밴드와 학교...는 아니었고, 군대와 회사에서 익히 겪었던 그것이다.

 

학원팟이니만큼, 설명시간이 조금씩 들고 몇 번은 좀 아슬아슬하게 잡기도 했다. 근데 공장이 참 잘한다. 설명을 심플하게 하며, 중요한 것을 잘 짚는다. 그리고 처음 해보는 사람들 입장에서 어떻게 느끼고 보일지, 그 입장에서 설명을 한다. 어쩌다 실수로 누군가 죽거나 스킬샷이 잘못들어가거나 해도, 그냥 넘어가지는 않고 피드백은 하되, 사람이 주눅들지 않게 하고. 그래서 결국 정해진 시간 내에 파티원 중 거의 20명이 다 되어가던 초짜들을 데리고 모든 네임드를 다 잡아버렸다. 신기했다.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 약 1년정도, 다음 레이드인 안토 시즌엔 회드로 신화 올킬을 하면서 고이게(...)되었다. 그무렵, 나는 다른 얼라 길드에 들어가있었다. 처음으로 길드원들이랑 디코나 오픈톡, 네이버 밴드 같은것도 하면서 놀고, 던전이든 레이드든 활동이 되게 활발한 길드였다. 그러다 어느날 저 공장이 그 길드로 들어왔다. 나는 반갑고 신기해서 내 입장에서만 기억하는 추억을 늘어놓으며, 친하게 지냈다. 나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이다(...). 그러다 그 유토피아 같던 얼라 길드에서 길드원 여럿이 섭섭해지거나 눈쌀 찌푸릴 일이 생겼고, 나는 그 꼴을 보기 싫어 길드를 나왔다.  비슷한 시기에 길드에 염증을 느끼고 나온 사람들과 새벽달 길드를 만들게 됐고, 임시 길마라며 길마를 맡았다. 그리고 저 공장님도 어쩐 일인지 반란군이라고 억울한 낙인이 찍힌 길드에 덜컥 같이 넘어왔다. 같이 노는게 재밌는 사람들이 다 여기로 갔길래 자기도 왔다고. 이후 내가 길마로 있던 그 새벽달 길드의 첫 번개에서 내 와생 첫 공장이자 가장 훌륭한 공장인 그 친구를 봤다. 역시 건실하고 착하며 똑똑하게 생긴 친구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친구 덕분에 와우의 공장에 대한 내 기대치 혹은 자격조건이 엄청 엄격해진 건 사실이다.

 

사실은 그래서 군단 마지막 레이드인 안토러스 레이드의 후반부터, 공장을 잡아보고 싶었다. 대장놀이 자체도 재미는 느껴지겠지만 딱히 그게 목적은 아니었다. 아예 시작도 하기 힘들었던 내가 천금같은 기회를 얻었듯, 누군가에게 재미와 감동의 이야깃거리가 넘치는 세상을 처음이거나 다시 만나게 해줄, 그런 기회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 공장처럼 되고 싶었다. 그래서 더더욱, 공장을 잡는 시점은 뒤로 늦춰졌다.

 

공장이 중요쿨기나 공생기 외생기 등 필수적인 스킬들의 이름도 잘 모르거나, 보스의 도감상 스킬도 잘 모르는 건 정말 무례하고 멍청해보였다. 자격이 없는 놈이 대충 하는 느낌이라 괘씸했다. 내가 부여한 공장이라는 자리의 의미는 그따위로 가벼운 게 아니다. 나는 그러기 싫었다. 공장이 그 공대에서 항상 가장 잘 하는 사람일 수는 없다. 그래도 그 공대원에 대해서나 마주하는 보스에 대해 가장 잘 알고, 게임에 대해 가장 관심과 애정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클래스의 스킬을 다 알 때까지, 모든 네임드의 모든 도감상 스킬을 다 알 때까지, 그 머뭇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벌써 마음을 먹고 난 뒤 네 개의 레이드가 지나갔다. 지금도 플레이어블 클래스의 모든 스킬이나, 도감의 모든 스킬을 다 알진 못한다. 그래도 어느정도 문제없이 진행할 수준은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시점이 됐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거기에 더해, 내가 원하는 컨텐츠를,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는 그 주도적인 느낌을 와우 안에서는 처음으로 가져보고 싶기도, 그리고 내 원래 성격으로 치자면 다시 되찾고 싶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