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덜기

여자-

Neon Fossel 2020. 4. 21. 11:13

어떤 직책이나 역할 명사 앞에 굳이 ‘여자’라는 수식어가 붙거나, ‘-가 여자인데’라고 구태여 말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상사, 선배, 후배, 어딘가의 ‘장’(회장, 사장, 길마, 공대장), 게임의 경우엔 ‘유저’. 하나같이 굳이 ‘남자’를 붙이지도 않거니와, 붙이면 이상하다. 그 자체로 부를 때 일단 기본값은 남자이겠거니 하는 관성이 무의식 중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앞에 굳이 ‘남자’를 붙이면, ‘역전앞’처럼 의미가 중첩된 느낌을 받는 게다. 반대로 생각하면, 굳이 ‘여자’를 붙인다는 건, 그만큼 ‘별난 일, 당연하지 않은 일’이라는 의미.

원래 그런 대부분의 자리에 남자가 많아서 -> 그게 당연해졌다는 식의 설명도 가능하다. 가장 편리한 방법, 사후합리화, 사후해석, 귀납적 해석.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렇게 ‘여자’라고 유별나게 강조할 정도로 남자일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 더욱 남자가 아닌 여자는 다수이거나 과반이 될 수 없는 것.

역관계인 두 명제를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와 비슷하게 볼 수도 있다. 피드백 상황이다. 돌고 도는 상황.

남자 사장, 남자 선후배, 남자 길마라고 구태여 부르지 않을 거라면, 그게 여자라고 해서 여자를 굳이 붙이지도 않아야 한다.

근대 이후 합리성을 전제로 한다는 사회 치고는, 여태껏 이 비대칭적인 단면이 신기하게도 방치되어 왔다. 아니, 정확히는 적잖은 수의 연구자와 활동가들에 의해 이미 시작된지 줄잡아 100년은 넘은 수많은 시도와 성취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타고 넘어야 했던 좌절과 실패의 순간은 그 성공보다 몇갑절은 즐비한 것이었다.

며칠 전, 와생을 정리해보는 글을 쓰다가 ‘여자 길마’라고 아무렇지 않게 타이핑하려던 손을 화들짝 멈춘 적이 있었다. 그리고는 일부러 자리를 바꿔썼다. ‘길마는 길마이고, 부길마인 그 남편은...’이렇게. 아직 갈 길이 멀다.

시청 청사에서 드러누울 열심이나 의지는 없다. 다만 나는 내 일상과 주변에서부터, 의무교육을 이수한 합리적인 사람들이 사는 사회라면 응당 바로잡혀야 할, 그 어긋난 단면들을 해결해나가야 겠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 그리고 나와 그대의, 우리 가족의 자유롭고 행복한 미래를 위해.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다. 어떤 큰 대의보다도, 나는 나와 내 주변의 행복을 위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가능한만큼으로 확실하게 부던히, 그런 세상을 만들 것이다. 생물학적 노인이 되었을 때, 뒤늦게 태어난 친구들에게 최소한 미안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