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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들, 실체, 거울

Neon Fossel 2020. 5. 15. 03:03

- 의외로 이쪽 섹터에 대해 아는게 많네요?
- 원래 호기심이 많고, 모르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 머리가 가만있질 않아서 그런가봐요. 교양이나 전공수업에서 곁가지로 들었던게 머리에 끈질기게 남아있거나, 재무쪽 현업일 때 그쪽이랑 코웍하면서 스키마 잡았던게 아직 안 날아가고 있는, 뭐 그정도입니다. 뎁스는 아직 깊지 않아요.
- 이정도면 시동거는 게 남들 반밖에 안 걸리겠는데. 아예 지금 정식채용하면 개인적으로 청년지원 같은 거 받는데 유리하지 않아요?
- 아, 그... 며칠만 생각해볼게요. 원래 진행중이던 다른 어플라이도 있고, 부업 삼아 하던 일도 교통정리를 해야하고 하니.
- 그래요. 생각하고 얘기해줘요. 같이 일할 애들은 또래 온다니까 좋아하던데.
- 아, 벌써 말씀을 하셨어요?...
- 그럼요.
- 근데 제가 중간에 연락드릴 때 일단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되나요? 대표님, 사장님, 등등? 사람들이 뭐라고 불러요?
- 걔넨 자기들 마음대로 부르던데. 일단 계약서 쓰면 그때부터 사장님 하고, 그 전엔 그냥 형이라고 해요.
- 아, 예.

 

오히려 옷을 편하게 입는 연습을 더 해야하려나. 누가 대표고 누가 예비직원인지 모르겠는 이상한 풍경, 그런 느낌. 원래 일할 때 입던 옷에서 반쯤 걷어내고 헐벗었는데도 이렇게 상대적으로 힘이 들어가 보일 줄이야.



 - 패닉에 빠지는 건 당연하고, 자극이나 충격에 반응하는 건 당연해. 근데 그 다음엔 생각을 해야할 거 아냐. 내가 상황, 변수, 그에 따른 경우의 수, 경우의 수에 대응하는 대안을 요약해줬잖아. 그럼 생각이라는 걸 시작해야될 거 아냐.
- 아으 씨, 짜증나
- 너 그거 하지마. 내가 그걸 처음부터 무시한 것도 아니고, 그럴만한 상황이라는 걸 충분히 공감해주고 대안까지 말을 해줬는데. 넌 그 말을 중간에 뱉을 때마다 앞에 차곡차곡 쌓아놨던 진단이나 솔루션이 완전 백지화 되잖아. 그게 뭐하는 짓이냐.
- 아니, 중간에 틀린말도 좀 섞어서 해라, 좀.
- 위기에서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는 기능 정도는 머리에 탑재되어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정도 되는 머리로 왜 생각을 안 하냐고. 놀라 나자빠지는 것 이상의 다른 반응과 액션이 나와야 머리값 하는거 아니냐? 드라마 Suits에서 하비가 마이크한테 그렇게 말하지, “다음부터는 누가 니 머리에 총을 겨누면, 그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152가지의 방법을 생각해내라”라고.
- 내가, 우리가, 이래서 널 친구로 놔두는건가 싶다.
- 그게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 넌 다 맞는 말만 하잖아. 틀리지 않으니까. 최악의 상황에서도 맞는 답을 찾으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니까.
- 맨정신으로 중요한 얘기는 알아들을만큼 얘기한 거 같으니까, 뻘소리 그만하고 술먹자 이제. 안주 다 식었다. 니 여자친구한테는 안주 식혀서 멕였다고 미안하다고 전해라. 들어갈 때 들어간다고 얘기하고.
- 하여튼 술먹는 것까지도 똑부러져. 미친놈.
- 맞는 말만 하는 미친놈이라는 건가. 앞뒤가 안 맞는 소리인건 본인이 말하면서도 알지? 말 이쁘게 해라.

똑똑한 놈이 나자빠지면 답답하다. 정신적 CPR을 했다.



뭐든 하면 잘 할 사람. 맞는 말만 하며, 어떻게든 맞는 답을 찾는 사람. 이게 나라고...? 익숙하던 말들이 새삼 낯설다. 그들의 기대일 뿐인 걸까. 그 기대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게, 실체가 될 수 있는 건가. 그렇게 비친 나라는 사람의 상이라는 건,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그 거울은 뒤틀리거나 하지 않은, 반듯한 거울일까.

나도 맞는 답을 항상 쉽게 찍어내는 건 아닌데. 나도 패닉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 못해 아예 널브러져버릴 때도 가끔은 있는데. 나도 아주 가끔은 아픈데. 나도 내 고민 속에서 외로울 때가 있는데.

내가 저런 평가를 감히 받아도 되는 건가. 저건 누굴까. 나인가. 나를 묘사하는 말들을 듣고 내가 부러웠다. 잘하자. 일해라 머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