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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o Elevator - [장르차별잔혹사]

Neon Fossel 2020. 5. 22. 04:42

장르차별잔혹사

앞서 말했듯, 이 노래로 인해 그런 '시끄럽고 신나는 노래들'을 듣게 됐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전자합성음을 도배한, 사람과 악기 자체 보다는 기계를 거쳤거나 아예 기계로 만든 소리가 많이 들리는 노래도 듣게된 거다. 그 전까지는 꽤나 고압적이고 배타적인 권위의식으로 재즈라는 장르에 매달렸었다. 열세 살 무렵까지는 그냥 피아노 학원에서 시키는 대로 클래식이나 유명하고 쉬운 재즈, 대중가요 반주들을 섞어서 연주하면서 개별 곡들은 즐겼지만 특정 장르에 대한 지향이나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다만 열세 살 겨울 방학 이후, 배웠던 피아노를 기반으로 베이스와 기타와 드럼까지 밴드 악기 연주를 확장하면서, 그 때 나를 가르쳤던 형들에 의해 재즈뽕을 심하게 맞아버렸다. 실제로 연주자들 중에는 본인이 일하는 분야와 장르에 상관없이 클래식이나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특히 많다. 클래식과 재즈는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 보컬이 아니라 악기가 주인공인 몇 안 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보컬이 전면에 등장하는 락이나 팝 등의 장르에서는 밴드가 거의 병풍처럼 쩌리인 이유가 있다. 목소리가 돋보이려면 악기는 적당히 비켜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근데 또 그게 실력이 부족하면 안 된다. 비켜있으면서도 그 지루한 걸 정확하게는 쳐야하니까 잘 해야한다. 그래서 대중음악의 연주자들은 고급교육을 받았으면서도 존재감이나 성취감, 금전적 이득과는 가장 거리가 먼 불쌍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연주자들이 선망하고 모방할만한 대상은 대부분  클래식이나 재즈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때부터 재즈의 우월함을 만끽했다. 사람의 터치가 악기 자체의 소리로 직접 발현되고, 4/4박자와 4비트 8비트 이상의 복잡한 리듬을 연주하며, 그게 라이브로 연주가 가능한 장르. 이렇게 스스로 추출한 재즈의 우월함은 곧잘 다른 장르를 배제하는 칼로 둔갑했다. 락은 맨날 하품 나오도록 단순하게 둥둥둥둥거리며, 4비트 8비트로 달리기나 해대면서 세상에 대한 불만을 시끄럽게 짖어대는 장르. 팝은 락보다는 덜 시끄럽고 발랄하지만, 그래봐야 어차피 4-5코드를 넘지 못하는 단순한 흐름에다가 가사는 너무 유치하고 상투적이어서 꼴사나운, 별생각 없는 애들이 대기업에서 찍어낸대로 아무렇게나 주워 듣는 장르. 발라드는 그냥 우울증 환자들이 대중으로 하여금 피아노랑 목소리만 듣고도 울게끔 만들려고 환장한 변태 장르. 힙합은 가사가 뭐라는지도 못 알아 듣겠는데 5분 내내 4코드를 넘지 못하는 지루한 진행에다가, 리듬은  죄다 메트로놈처럼 기계가 돌려대는 핵노잼에 세상에 대한 불만 +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지만 제일 고생했다고 징징거리는 중2병 터지는 장르. 맥북이랑 이펙터, 런치패드, 턴테이블만 가지고 뿅뿅거리는 일렉트로니카는 그냥 오락실로 꺼지라고 하고 싶었다. 그딴걸 어디 음악이라고. 이런식으로 재즈처럼 복잡하고 참신하게, 라이브로 연주될 수 있는 게 아니면 그저 다 재미없고 단순한, 음악을 모르는 '일반인들이나' 듣는 장르라고 업신여겼다.

장르에 대해 이렇게 시커멓게도 배타적이며, 유치하고 치기어리게도 좁은 시각을 가졌다고 고백하는 건, 써놓고도 정말, 정말, 정말 부끄러운 과거다. 자수해서 진술서에 자백하듯 힘들다. 지쳐서 몇 번을, 몇 번의 끼니와, 몇 번의 달이 뜰 만큼을 쉬었다가 썼다. 장르를 저런식으로 비난하는 건, 마치 '직업에 귀천이 [있다]', '유태인은 차별 당해도 괜찮다' 등의 명제를 인정하는 것만큼이나 부끄러운 짓이다. 그러다 이 노래, 디스코 엘리베이터를 계기로 글렌체크와 디스코, 신스팝, 일렉트로니카에 대해 알게 됐고, 그것을 시작으로 클래식과 재즈가 아닌 장르들에 들이대던 칼을 버렸다. 군을 전역했을 스물 세 살 겨울 무렵이 되어서야, 장르우월주의 병에 걸린 지 꼬박 10년 만에 그러기 시작했다. 이런 문장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시끄럽다고 귀를 닫으면, 그 세계는 열어보지도 못하고 닫힌 채 지나간다."

락은 직접 해보니, 둥둥둥둥 장가장가장가 하는 장르만 있는 게 아니더라. 단순해 보이는 그 흐름에 강약과 빌드업, 그리고 합이 칼같이 맞아들어갈 때의 카타르시스가 있다. 팝은 최대 다수가 최소한으로 합의할 수 있는 선에서 공유할 수 있는 메세지와 무드를 전달한다. 그리고 사실은 듣기 쉽게 들린다고 해서 만드는 것까지 쉬운 건 아니다. 아이돌 노래를 작곡하고 마스터링하는 사람들을 알게 되면서, 우리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사람들이 부스에 일주일씩 갇혀서 해도 쉽지 않을만큼의 노력이 들어간다는 걸 알게 됐다. 부스에 이틀만 갇혀도 악취랑 기름에 쩔고 등이 부서질 것 같아서 못 견디겠던데. 대단하다. 힙합에서 백그라운드에 깔리는 비트랑 베이스는 사실 엄청 신경써서 소스를 믹스하고 포지션을 잡는다는 걸 알게 됐다. 안정적으로 계속 들려줘야 하는데 거슬리거나 늘어지면 안 되니까. 그리고 그렇게 악기가 비킨 자리에 들어간 가사의 내용과 랩의 리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 이것도 이렇게 들으니 악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