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재미있게 해줄게

Neon Fossel 2020. 5. 28. 10:32

수현이는 예뻤다. 좀 통통한 편이었지만, 그걸 무시하거나 참을만큼은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했다. 공부를 잘 했다. 주로 자리에서 잘 일어나지 않았다. 가끔 좀 까칠하고 도도했다. 말이 많지도 않고 잘 웃지도 않았다. 짜증내거나 무표정 둘 중에 하나였다. 대부분의 남자애들은 그 앞을 지나가면서 싸늘한 눈초리로 시선채찍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라 벌벌 기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걔한테 긴장 없이 막 대하거나, 욕을 먹어도 주눅들지 않거나, 미친소리 한다고 한소리 들으면서도 기어이 웃길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었다. 짝이라 그런가. 다른애들이 짝일때는 얄짤없던데. 역시 나는 얼굴에 철판을 10센치 쯤은 깔았나보다.

컴퓨터시간이었다. 간단한 HTML 코드 몇 줄을 써서 결과페이지를 출력하는거라, 일찌감치 해놓고 옆에 공부 빼고 다 잘하는 꿀잼친구랑 피카츄배구랑 웜즈를 2p로 하면서 놀고 있었다. 갑자기 뒤에서 누가 등을 콕콕 찌른다. 수현이다.

“야... 나 이거 못하겠어.”

세상 똑똑해서 생전 누구한테 뭘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 시험점수만 독식하는 녀석이 웬일이지. 등을 맞대던 상태에서 의자를 돌려 모니터를 봤다. 중간중간 닫지 않은 태그가 몇 개 보이길래 저거, 저거 손으로 툭툭 모니터를 찍었다. 시키는대로 한 두 개 고치는 걸 지켜봤다. 와. 그나마 독수리 타법이 아닌 게 다행이지, 정말 드럽게 느리다. 피카츄배구를 일시정지 해놔서 같이 하던 녀석이 징징거린다. 고칠 게 꽤 많은데, 시키느니 내가 하는 게 빠르겠다.

자리를 일어나서 바꿔앉는게 귀찮길래, 의자만 돌려서 바로 뒤에 붙었다. 비키라고 해봐야 옆에 비킬 데가 없으니까. 그 상태로 손만 양 옆으로 치우라고 하고는 대신 내가 그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이때까진 몰랐다.

“허....ㅅ...”

?? 뭐야 이 이상한 소리는

아 이런... 그냥 뒤돌아서 대신 키보드에 손을 올렸을 뿐인데, 동작을 조합해놓고 보니 뒤에서 껴안는것처럼 됐다. 얘는 쓸데없이 얼굴이 빨개지고 난리야. 그러면서 난 한박자 늦게 당황했다. 그 상태에서 빼면 더 이상하니까, 그냥 빨리 명령어를 고쳐 썼다. 제발 아무도 보지 마라. 그럴리가 없었다. 3초만에 앞뒤자리에서 ‘오올 너네 뭐하냐 ㅋㅋㅋㅋ’같은 끔직한 소리가 들린다. 아놔. 또 이거 가지고 한 학기를 우려먹게 생겼네.

그러다 짝을 바꾸는 날이 됐다. 요새 영어랑 국어선생 성대모사를 하면 잘 웃길래, 사회선생 성대모사를 준비중이었다. 근데 짝을 바꾸면 드립을 치기가 불편하잖아. 가만히 생각해봤다. 나는 반장이지. 그리고 담임은 원래 내 편이다. 이미 수업시간마다 선생들이랑 농담따먹기 하면서 어느정도 정신나간 소리를 해도 다 그러려니 이해하는 편이다. 그래, 그럼 질러야지.

“쌤, 저 자리 안 바꾸면 안돼요??”
“니 자리만 고정해봐야 어차피 짝은 바뀌는데”
“아니, 저랑 짝이랑 같이요.”

.....?

“다른 반은 반장 하면 수행평가 점수 더 주고 하는데, 쌤은 듣기평가 하나씩 나가면 얄짤없잖아요. 저도 뭐 하나 주세요. 저 짝 안 바꿀래요.”

수현이가 옆에서 올려다보더니, 당황해서는 속삭인다.

“뭐야 미친놈하ㅏㅏㅏ”

“아 좀 가만 있어봐. 재미있게 해줄게.”


마지막 내 말이 너무 크게 들렸나. 교실이 술렁대더니 파도가 친다.

재미있게해준대 재미있게해준대 재미있게해준대 재미있게해준대 재미있게해준대 호오 재미있게해준대 재미있게해준대 재미있게해준대 재미있게해준대 ㅋㅋㅋㅋ 재미있게해준대 재미있게해준대 호오 재미있게해준대 재미있게해준대 헐 미친 재미있게해준대 재미있게해준대 재미있게해준대

“뭐라고?”

“재미있게 해준다고.”

다행히 짝이 안 바뀌었다. 오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