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aporated
BG(Bravo-Golf)864833, 3.0km, 200x100 검은 물체, 창조류 타고 좌에서 우로 이동하는 것, 니콘 관측.
‘검은 물체’. 제기랄. 대부분 정말 그냥 쓰레기나 판자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게 사람이나 어떤 장비라면 문제가 심각하다. 사람이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귀순인지, 정찰이나 침투인지. 장비라면 무인장비인지, 목적이 정찰인지 폭격인지.
최종적인 감식이나 회수는 어차피 기무사령부나 폭발물처리반(EOD)에서 와서 처리한다. 그 전에 최초로 나가서 현장을 고정하고, 통제하며, 최초 증거를 수집한다. 사진도 찍고.
운이 없을땐 일주일에 두 번, 좀 평안한 시즌에는 한 달에 한두번, 저런 일이 있었다. 대부분 훈련중에 실족했거나, 아니면 굶었거나, 그도 아니면 탈출인지 귀순인지 모를 발악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적이었다.
사람은 전쟁에서 영화처럼 멋지고 곱게 깔끔하게 죽지 않는다. 총을 맞았거나, 혹은 물에 빠졌거나, 혹은 둘 다라면. 총을 맞으면 그 반대방향으로 몸이 꺾이고, 탄이 나가는 구멍은 끔찍하게도 컸다. 피는 생각보다 너무 콸콸 나오거나, 혹은 분수가 아니라 폭포수처럼 나와서 할 말을 잃는다. 물에 빠졌다면, 언젠가 사람이었을 흔적을 찾기가 꽤 어려운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그런 것 때문에 밥을 못 먹었다. 징그럽고 무서웠는데, 그렇다고 뒤로 뺄 수도 없고. 일단 나갔다 오면, 몸에선 밀가루가 미끈미끈하게 묻은채 썩은 것과 비슷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리고 한 번 보기에도 힘든 그런 장면들을 무려 디카로 사진까지 찍고 1차 현장보고서까지 쓴다니, 해도 너무했다.
그런데 나중엔, 그런것들 보다 다른게 눈에 들어왔다. 옷을 뒤지다 보면, 이런저런 가족이나 연인의 사진이 나왔다. 사진 뒤에는, 언제 누구와 찍었는지, 보고싶다던지, 그립다던지 그런 글귀들이 있었다. 그걸 보면서 상상했다.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연인. 그랬구나.
그 사람이 다른이와 관계맺고 있던 우주가, 사라졌다.
다른이가 이 사람과 함께하던 세계가 송두리째 터져나갔다.
이렇게 덧없이. 피죽같이 짓무르고 갈가리 찢긴채로.
그런 생각이 들 때부터, 가끔 현장에 나갔다 오면 하는 의식(Ritual)이 생겼다. 명찰이 붙은채로 군복이 남아있었다면, 그 이름을 종이에 썼다.
부디, 잊히지 않기를.
그 세계와 우주의 마지막을 지켜본 누군가가 있었다는 걸 알아주기를.
그렇게 바라며, 투명한 유리로 된 두유병을 사서 먹고, 그 안에다 이름을 쓴 종이 쪽지를 태웠다. 그리고 그때부터, 모종의 네트워크를 만들기 시작했다. 형제가 없던 나는, 형제같은 사람들을 여기저기에 참 잘도 만들어놨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해줄지는 의문이지만, 하는 걸 보면(?) 적어도 그 비슷한 어딘가엔 있나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인사와 정리조차 하지 못하고 증발(Evaporation)한다는 건, 그들과 나 모두에 대한 예의도 아닐 뿐더러 너무도 아쉽고 슬펐다. 내가 쪽지에 태워서 대신 안부를 전했던 그 마흔 여덟개의 세계처럼.
그래서 내 생에 깊이 닿아서,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겉과 속의 조각을 가진 그들에게, 마지막 인사와, 마지막으로 할 일을 주었다. 우습게도 그런데에 각각 들어가는 교통비와 식비까지도 넉넉하게 준비해놨다. 그걸 배포하는 사람도 따로 있고. 그래서 그들도 나의 인사을 듣고, 나를 위해 뭐라도 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고리의 마지막 단에는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이 나의 인사를 놓치지 않도록.
그러고나니, 현재에 더욱 충실하게 됐다. 그때밖에 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은 분명 있겠지만, 그게 아닌 모든 것은 매번 미루지 않고 현실의 지금에 충실한다. 친우들에게는 바래지 않는 의리와 배려를, 사랑하는 귀한 이에게는 표현과 행동을 가벼이 여기거나 미루지 않는 사랑을.
그리고 언제나 기록들을 소중히 여기게 됐다. 이거야 어차피 어릴 때부터 원래 그랬던 거지만, 마음을 담아 더욱. 우리가, 어디서 무얼 했는지, 그 때의 생각과 마음은 어땠는지, 그래서 어떤지. 이런저런 기록들을 참 많이도 남기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머리속에서도 똑같이 그게 새겨지게 된 것 같다.
한 사람이라는 세계와 우주가 그렇게 쉽고 덧없게 터져나갈 수도 있다는 걸 보면, 사실 여러 반응이 나온다. 어차피 '죽으면 다 끝이야', '그러니까 뒤가 없다는 듯 막 살아' 이런 식으로도 가능하다.
아니, 그런데,
나의 우주는, 그러지 않기로 선택했다.
언제 어떻게 터져나가고 바스러질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매순간은 아름답게 채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우주는, 소중하게 꼭꼭 담은 예쁜 기억 위에 견고하게 자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거와 현재에 있었거나 있었고, 미래에 있을 그 [기억]은, 나라는 연약한 존재가 잠시 흔들리거나 혹은 아예 없어진다 해도, 그렇게 쉽게 어딘가에 쳐박히거나 흐려져서는 안 된다.
사람이 감내할 운명은 가혹하고, 사람은 연약하다. 나는 매순간 상황과 감정에 휩쓸릴까봐 조마조마하는 그런 존재다.
그런데,
부던한 의지와 진심이 담긴 행동이 쌓아놓은 체계와 세계는, 그런 연약한 나로부터 나를 지킨다. 그래야 한다. 나는 약해도, 그런 나를 보완할 나의 체계는 나보다 강하다. 그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