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답 - 글의 역사
네온, 글의 역사
유소년기, 누가 안 시켜도 재미 없어 보이는 책을 새벽부터 일어나서 읽던 게, 글쓰기도 아닌 글과 관련된 유일한 특징이었습니다. 그러다 학교에서 쓰라고 하는 독후감, 미래 상상 글쓰기, 도시계획, 평범한 주제의 백일장 등에 글을 내 봤지요. 쓰면 반 좀 넘게는 상을 타오긴 했는데, 그냥 스스로 생각하기에 남들보다 어려운 책을 읽을 때 어깨너머로 대충 익힌, 나이에 비해 어렵고 늙수그레한 단어들로 발랐(...)더니 채점하는 선생님이 '얘 뭔가 있나'싶어서 속아 넘어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때까지 스스로 어떤 글을 평소에 쓰진 않았고, 장르라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거나 접하지도 못 했습니다.
중요한 계기는 아마 몇몇 분들도 공감하실 싸이월드입니다. 친구들은 거기다가 감성터지는 사진이나 짧은 글귀, 예쁜 브금을 신나게 올리는데, 저는 거기다가 제 고민을 적기 시작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다 적당히 괜찮다는 정도로 사는 게 정말 괜찮을까 - 괜찮병', '사람이 금수랑 다르다고 구분지을 조건은 뭘까', '모든 사랑은 중고야'(쿨럭) 등등의 주제로 글을 썼던 게 기억나네요. 지금과 별반 다를바 없지만, 그때 역시 장르와 작법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에세이를 가장한 푸념을 썼습니다. 그러다 싸이월드 파도타기를 통해 넘어온 친구들과 젊은 선생님들 몇몇에게 발각되었지요. '글을 겁나 길고 많이 쓰는 애', '뭔가 어른처럼 글을 쓰는 애', 이것이, 제가 스스로를 모르던 시기에 남들이 규정해준 제 글에 대한 정체성의 전부입니다.
그러다 중고등학교와 싸이월드라는 배경이, 대학과 페북이라는 틀로 바뀌어 이어졌습니다. 대신 대학에 와서는 머리에 어줍잖게 들어간 지적 허영심 덕에 세상과 부조리에 대한 불만, 사물이나 사건이 스쳐지나갈때의 감상 등이 더욱 예민해졌습니다. 역시 강아지 버릇 남 못 준다고, 싸이월드에서 하던 짓(...)을 페북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주된 컨텐츠는, '정치적 상호 혐오가 얼마나 야만적인지', '장르별로 음악을 듣는 방법', '개별 곡이나 악기에 대한 감상이나 기초적인 방법론', '경영 전공자로서 작금의 사태가 얼마나 데이터를 무시하는 안하무인한 요지경인지', '하늘의 구름이랑 달 사진찍고 터진 센치를 냅다 방출하기', '금융의 첨단을 배운답시고 땅에 관심 없는 아들과는 너무도 다르게 땅의 성실에 기대어 농사짓는 부모님에 대한 꽁트 비슷한 기록'. 이쯤이 있습니다.
그러다 원하는대로 회사생활을 시작했는데, 일주일에 자는 시간이 30시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 때 알았습니다. 내가 못 하면 제일 답답한 게 뭔지. 음악을 듣거나 연주하고, 글을 쓰는 것. 그걸 못 하니까, 분명히 나는 살아가고, 돈 쓸 시간도 없이 통장에 돈은 찍히는데, 나라는 플레이어가 인생을 플레이하지 않고 있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고 나서 얼마 후, 남들에게 미친놈 소리를 들으며 멀쩡하게 뻥뻥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고 한 두 가지의 진로를 재미있게(답없이 방황하며) 탐색하고 살면서, 기존에 쓰던 시와 에세이를 좀 정신차리고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몇몇 앱에다가 끄적거리고, 그러다 그렇게 흩어져 있는게 아쉬워서 블로그에 아카이브로 쓰고 있지요. 최근의 목표는, 시와 에세이를 넘어서 '소설'을 써보는 것입니다. 시와 에세이의 화자도 물론 가공의 인물일 수 있지만, 저는 대부분 스스로를 소모하고 자백하듯 써왔거든요. 지금처럼. 근데 그게 그러다보니 지치더라구요.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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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불타오른 아닌밤중에 300자 15분 무작위 질문 릴레이. 이게 어딜봐서 300자. 타의로, 억지로라도 끄집어내지니까 이런 것도 쓰게 되는구나. 나중에 좀 디테일하게 써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