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adio silence
무선 침묵, 무전 침묵, 통신 침묵. 보안이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통신수단을 정지하는 것. 밀덕이라면 영화에서 종종 들었을 대사다. 실제로 적이 아군의 통신을 감청하거나, 침투 시 존재 자체를 감지당할 위험이 있을 경우에 일시적으로 명령이 내려진다. 비슷한 예로 잠수함도 적진 깊숙이 침투해서 레이더를 피해야 할 경우, 일시적으로 모든 통신장비와 내부 전자장비, 심지어 엔진까지도 꺼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괜히 저 단어가 떠올랐다. 별 상관없이.
연결을 갈망하는 세상이다. 나도 연결을 즐거워하고, 단절은 두렵고 심심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가끔 단절이 귀찮지만 필요하기도, 혹은 그것을 의외로 원하기도 하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연결을 견디기 위한 충전이 단절이라는 느낌이기도.
자주 인용하는 말대로, 인간의 신체와 본능은 신석기 이후로 거의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이 제도와 기술로 확장하고 극복한 물리적/사회적 한계는 그 시대와 신체에 비해 수백-수천 배로 빠르게, 짧게, 가깝게, 자주, 많이 ‘접’하도록 / 접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사회심리학에서 밝혀낸 바에 따르면, 인간이 실질적으로 ‘인지’ 수준에 놓을 수 있는(쉽게 말해서 존재를 잊지는 않고, 알고는 지낼 수 있는) 숫자는 60명이다. 그리고 확실하게 자신의 경계 안에서 면밀하게 소통하며 챙길 수 있는 숫자는 3-5명이다. 어차피 무의미하게 스쳐갔던 sns의 친구 숫자는 차지하더라도, 일회성이든 깊은 관계이든 우리가 실질적으로 ‘접’하고 있는 숫자는 줄잡아 기백은 넘는다. 즉, 우리는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을 만큼의 연결을 손에 쥐었고, 직면하고 있다.
때로는 그때 확장되는 지식과 경험이, 그리고 어떤 편리함과 해방감이 유용하고 재미있다. 하지만 어느샌가 서로라는 존재가 딱히 누적되지 않음을 느낀다. 그래서 ‘나’ 혹은 ‘그’라는 자타가 피차 각자의 존재 전체를 비슷하게 묘사해가며 완성해가는 게 아닌, 그때그때 직면한 상황과 그룹에 따라서 나의 어떤 면들이 파편적으로 부각되거나 자의 혹은 타의로 끄집어내 진다.
자아는 타인에 의해서 확인된다는, 여러 분야에 걸쳐있는 명제가 있다. 그건 요즘 반만 맞고 반은 틀린 말이 되어버렸다. 자아가 확인되려면 타인이 있어야 하고, 자타가 구분되려면 각각의 ‘존재’라는 게 서로에게 누적적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그러기 어렵다. 나를 확인시켜줄 나 ‘밖의’ ‘타인들’은, 나의 파편만을 말 그대로 조각조각 들고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의 파편들만 한 움큼 쥐고 있다. [내가 보기에]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다-라고 쉽게 말은 할 수 있지만, 과거와 그 의미는 크게 달라졌다. 용도제한적 존재, 시간제 존재, 익명적 혹은 아바타적 존재.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확인시켜줄, 피차에게 바깥의 경계가 되어줄만큼 온전한 존재가 되어주기 어려운 건 아닐까. 여기저기서 파편적으로 확인되는, ‘나’라는 정체성이 혼란스럽다. 그래서 우리 이전 세대들에 비해, 적지 않은 나이에도 이전 세대들이 고등학교 때나 했을 법한 고민을 아직도 손에 쥐고 어쩔 줄 몰라하는 건 아닐까.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서로가 서로에게 용도제한적, 파편적인 한정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러지 않은 어떤 사람, 어떤 존재는 굉장히 귀하기도, 반갑기도 한 게 아닐까.
너와 나는
있는가
정말 거기에
—/
달달할 발렌타인에
별로 달달하지 않은 생각
관심없는 그런 시간과 풍경을 뒤로하고
Happy bloody valent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