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ng Frame_00
토론토에는 ‘무려’ 전차(Street car)가 있다. 어쩌다 방송에서 본 몇몇 유럽과 일본,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정도에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중 일본은 캐나다 가기 전에 여행 갔을때 직접 타보기도 여러번 타봤고. 그래도 여행으로 며칠 다녀오거나 화면에서 보는 것 말고, 내가 아예 몇달 이상 살아야 하는 일상에 전차가 있는건 느낌이 많이 달랐다. 보기엔 신기하고 재밌지만 볼때마다 ‘저 애매한게 왜 아직까지도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정해진 노선을 레일따라 움직이기만 하는 건 전철이나 지하철이랑 똑같고, 근데 그게 그냥 지상일뿐만 아니라 버스나 일반 차량이 다니는 도로와 차선에 버젓이 같이 다닌다. 버스나 지하철 둘중 어딘가에 흡수되어 없어졌어야 할 것 같은데, 희한하게 그냥 남아있는 모양새.
사실 나의 경우는 웬만큼 이동할 땐 거의 버스와 지하철이어서 굳이 탈 일은 없었다. 다만 다운타운에서 평소 안 가던 곳을 갈일이 생기거나 하면 어쩌다 구글맵이 짜준 노선에 낑겨있어서 좀 뻘쭘하게 탔을뿐. 역시나 내부의 구조와 풍경도 참 애매한 그것이다. 지하철같기도 하고, 버스같기도 하고. 노선도 대부분 버스나 지하철과 비슷한데 애매하게 짧은 도심의 어딘가와 어딘가 사이 정도를 운행한다. 그래도 유물처럼 보여주기 식으로 남아있다기엔 노선도 많고 사람들도 많이 쓴다.
어학원에서 약간 충격적인 중상급 레벨테스트의 결과를 딛고, 한창 탄력을 받아 신나게 월반으로 치고올라가던 유학 초중반이었다. 매달 수강신청때 과목마다 레벨 범위가 제한된 것들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중급-중상급-상급 레벨로 올라갈수록, 분명히 필수과목을 제외하고는 자유신청을 했는데도 대충 15명중에 8명정도는 아는 얼굴. 그 나물에 그 밥. 점점 돌고 돈다. 심지어 그와중에 또 친구들이랑 친해졌다고 우르르 몰아서 같이 신청하기라도 하면, 이건뭐 거의 같은 반 고딩친구.
좀 신선한 과목이 없나 하다가 좀 어이없는 수업 이름이 눈에 띄었다. ‘캐나다에 있는’, ‘모든 생활과 수업 자체가 어차피 영어인’ 학원에, 무려 [영어 회화]수업이…굳이? 어차피 영어 회화 상황이라는건 와서 살고 공부하는 모두가 이미 똑같으니, ‘그걸 어떤 컨텐츠로 할거냐’는 식으로(비지니스, 대학수업대비, 역사, 글로벌 이슈, 영상매체-가장놀고먹는개꿀반, 작문, PT 등등) 과목이 구성되어있는 게 일반적이었다. 근데 굳이…? 영어 회화? 세부사항에 보니 뭐 당연히도 뻔하지만 중요한 설명이 써있다. ‘매우 일상적인’ 대화상황에서의 꿀팁 대방출(의역) - 롤플레잉 잘 하는 사람 환영! 겁쟁이 ㄴㄴ해(이건 직역). 오호라. 뭔가 돌아이같은 걸 할 수 있겠다. 어차피 한 달에 2학점 정도는 즐겜해도 된다는 마인드로 신청했다.
아직도 선생 이름이 기억난다. Shawn Fletcher. 어딘가 미드에서 본, 덩치도 평범하고 털복숭이에 네안데르탈인 비슷하게 생겼는데 묘하게 멀끔한 그런 백형이었다. 유쾌하고 똑똑했다. 일부러 말을 천천히 해주지 않았기에, 듣는 학생들로 하여금 빡쳐서 실력이 늘게하는 재주가 있었다. 정말 미국인 씨부리듯 씨부렸고, 미국인이었다. 나중에 못 따라와서 못 들은건 질문을 따로 받더라도 일단 처음에 지 할말은 달리고 보는 사람이었다. 마트에서 물건 살 때 물어보기, 청바지 산 곳에서 기장 줄일 수 있는지 물어보기, 고객센터 전화해서 따지기(그러다가 역으로 털리기), 진상 집주인이랑 한바탕 하기, 홈리스랑 대화하기, 노인네들이랑 얘기하기(이땐 진짜 노인네 알바생이 놀러왔었다), 남친/여친이랑 싸울 때 선 넘기 직전까지 상대를 박박 긁을 수 있는 표현들 등등. 지나서 생각해보니 참 알찼다.
첫 수업이었다. 무작위로 마주앉은 상대랑 롤플레잉을 하거나 그냥 떠들거나 맘대로 하기였다. 반묶음을 하고 앞머리를 거의 쪽빗으로 빗은것처럼 가지런하게 쓸어내린 여자애였다. 누가봐도 일본사람이었다. 하얀 블라우스에 남색 가디건, 그리고 엄청나게 길어서 무릎 밑으로도 한참을 내려오는 체크치마, 하얀 양말. 어쩜 저렇게 사복으로만 구성했는데도 교복처럼 입은걸까. 교복도 야동이나 애니에 나오는 그런 세라복이라기보단 그냥 옛-날 빛바랜 일본 로맨스 영화에 나오는, 하품나오는 그런 교복. 캐나다 오기 전 일본여행을 몇번 갔을 때, 오사카 변방의 아침 등교길 지하철에서 떼로 봤던 정말 리얼리티 그대로의 교복느낌. 외국까지 와서도 ‘부모님이 엄하셔서’ 혹은 ‘곱게 자라서’를 저렇게 온몸으로 표출하는 캐릭터는 처음 본다.
내가 여기(캐나다)에서 봤던 일본 여자애들은 다들 못생기고 옷은 아줌마처럼 입으면서도(화려하고 촌스럽게 번쩍거리는 패딩, 정신나갈거같은 원색의 스타킹이나 레깅스) 화장은 요란하고 맨날 기회만 있으면 술먹는 애들이었는데. 그래서 ‘일본여자는 뭔가 순종적이고 수동적인게 은근 매력이지 않을까’ 하는 환상은 이미 깨진지 오래였다. 물론 표본오차가 있을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냥 거기서의 일본 여자애들은 하나같이 못나고 요란한 형광색 저글링들이었다. 한번에 부대지정해서 저-기 구석으로 어택땅 찍어놓고 멀리멀리 사라지면 좀 조용하고 평온해지는. 근데 얘는 뭐지. 진짜로 옛날 순정만화에서의(비유는 이렇게 하지만 매체에서 예시로 든 순정만화의 표지만 봤을뿐, 순정만화는 정작 한번도 본적 없다. 오그라들어서) 그 어렵디 어려운 캐릭터가 만화 찢고 튀어나왔네.
나 뿐 아니라 대부분은 사람을 보면 얼굴, 그중에도 눈부터 보기 시작해서 나머지를 보는데, 저런 스타일과 분위기가 하도 생경해서 나중에서야 얼굴을 봤다. 약간 대책없이 순진하거나 똘망똘망하거나 하다. 한효주에서 눈을 더 키우고 덩치는 중딩정도로 줄여놓은 것처럼 생겼다. 평온한건지 졸린건지 담담한건지 아님 긴장해서 굳은건지.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알수없이 정적인 표정이다. 못생기지 않았구나. 다행이다. 적어도 핑계대고 다른데 눈 돌릴 수고는 안 해도 되겠네. 근데 이거 생긴거나 분위기로 봐서는 이번 시간에 몇마디 하기라도 하겠나, 아… 수업 단가 떨어져. 그래도 애써 에너지 넘치게 말을 걸었다. 할건 해야되니까.
-Hi, What brings you to this class?
-…? ... ...
-Sorry, I mean, what is the reason that you chose this class?
(이래서 원어민들식으로 말하는 걸 배운 게 오히려 상대도 영어를 세컨 랭귀지로 배우는 사람일 땐 도움이 안 된다. 망할 원어민 술친구 + 점심시간마다 노가리 까주던 학원선생들…)
-Ah!(매우 닛뽄스럽게), to… practice.(이 두 단어를 들으려 기다리는데 영원과도 비슷한 시간이 흐른 것 같다. 근데 묘하게도 쉬이 말하지 않으니 계속 집중해서 듣게된다) By the way… I’m… Chiemi.
-Oh, I forgot to tell you my name, first. kkkk I’m…
-파..트리ㅋ?
-Wah, How do you already know me? or my name?
-Some.. of my friends… sometimes… told me. So.
-OMG, what did they tell you about me? kkkk
-Good things… Maybe… haha… Sorry, I’m… shy and my English is… bad. haha…
-No, don’t say like that. I’m trying too. I’m practicing too. It’s fi-ne. All good.
-Why… do you practice?… you speak really really… fast and… naturally, already.
-It’s because I feel sometimes like, I’m not enough. Even nowadays, I got so many things I don’t know how to say in English in my daily life.
-You… ‘are’ saying ‘that’ in English. It’s… … funny. haha… sorry.
-kkkkkkk you are funny too.
-I… am?
-Yeah, for sure.
-Usually, … I think that… I’m… a… boring person.
-Don’t worry. NOBODY can get bored or boring with me. That’s not gonna happen.
-Haha, Thank you(?).
-Quick question. What place do you love most in here Toronto? Not a tourist thing.
-Umm… I thought harbourfront but… not a Tourist… It’s hard… Ah! I… sometimes visit a cafe…
-Wait, Let me guess. It’s…thhhhhh……e… Panera Bread?
-Haha, Yes. Do you… like? I think everyone likes Tim Holtons.
-I surely do. I got a membership and call name there, even. It’s wide, peaceful, and beautiful place. I like its colour also. Colour of furniture, leaves, and sunshine coming through them.
-Wow… you really like that place. I do, too. It’s cozy and… delicious bread. Honestly, I heard… clerk calling “Patrick#something…number”. haha. You were there with Yuka and another guy.
-Oh, you know Yuka and were there? why didn’t you join us?
-I don’t know… haha. As I said… I’m a… shy person. I thought it… could beee~?… not that… polite. hehe.
-Next time you see, just jump into us or me.
-Jump into… haha okay. Um… I heard that you are… Korean. Is that right…?
-Yes, that’s right. 1 point for Chiemi! Good job! haha.
-You’re… not like Asian or Korean, … both.
-Haha, what does that mean? Is that a compliment?
-I don’t know. Haha. Just…a…..um… differ..ent. So confident. And… you are… the only Korean guy who… didn’t say about Kimchi, 삼겹살, Soju, Samsung… in the first time meet each other.
-I also kinda love those. Except for Samsung, haha. But.. a…. It’s just too typical. It’s a group or country things, not ‘just’ about me myself. Also I think that people from other country are sooooo sick and tired when every single Korean talks about those things. That’s why.
-Oh… Right. Interesting. I think… I found a good one.
-Yeah, you did. haha just a kidding. But… somewhat… could be true…? we’ll see. I know it was a very short time but… you are not just shy and boring. You are thoughtful and polite. Just that. I… Kinda like it.
-Hehe, thank you for saying that.
눈 크고 덩치 작은 한효주와의 한일 정상회담은 그렇게 끝났다. 그 뒤로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난 주로 쉬는시간에 카페테리아 전자렌지 앞이나 테이블에서 애들이랑 떠들다가(주로 당일 술약속이나 주말 놀러갈 약속을 잡거나 / 전날 페북이나 인스타에서 누가 뻘짓했다더라 하는 낄낄거릴 소재들) 헐레벌떡 수업에 들어가기 일쑤였는데(…), 어차피 Chiemi 옆자리는 항상 비어있어서 따로 자리 맡을 필요가 없었다. 개꿀. 애가 말을 잘 안해서 몇몇 애들이 친구먹자고 들이대다가 실패하더니, 어색해하거나 싫증내고 떨어져나갔기 때문이다. 승질머리 급하고 단순매력 터지는 남미 애들이나 세상이 그냥 다 제 친구인 것 같은 유럽애들은 그거 못참지. 어차피 둘러앉는 모양새라 앞뒤자리는 의미가 없었지만, 적당히 선생 말이 잘 들리면서도 우리끼리 떠들어도 불편하지 않을 거리와 각을 잘 재서, 알아서 잘 앉아있었다. 물론 그렇게 옆자리는 항상 비어있고, 와서 앉아봐야 내가 앉을걸 뻔히 알면서도 매번 내가 아슬아슬하게 훅 들어와서 우당탕 앉을때마다 괜히 화들짝 놀랬다. 그때마다 선생 Shawn은 “Safe, Patrick. That was close. You bad boy.”라면서 지각 한번만 해보라는 표정으로 짖궂게 웃었다. 그리고 Chiemi는 노트, 볼펜, 무려 영-일 전자사전(…ㅍ…파나소닉…일제 스고이;)을 각 맞춰서 펴놓고 약간은 어이없다는듯이 찡긋 웃었다. 난 옷이랑 가방이 뒤엉킨채로 주섬주섬 그제서야 책을 꺼내면서 선생이 이상한 장난치는거에 듣는둥 마는둥 대충 듣고 대답하고.
(To be continued. 짤라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