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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ng Frame_01

Neon Fossel 2021. 6. 29. 10:15

어학원에서는 쉬는시간을 포함해서 언제 어디서든 규칙상 영어가 아닌 다른 말(특히 대화중인 멤버중 하나의 모국어)을 쓰면 안 된다. 이걸 어기면 과속딱지처럼 노란 카드로 된 딱지를 떼고, 벌점이 심하게 누적되면 클래스 선택 등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누적된 벌점은 수업에 도움이 되는 봉사활동 등으로 깔 수 있다. 이걸 선생들이 하나하나 다 잡아낼수가 없으니, 달에 한 번, 오피스에서 학생중에 신청을 받는다. 그럼 걔네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딱지를 뗀다. 대신 그 다음달 학원비를 좀 깎아주는 식. 그렇다고 친구를 배반하는 극도의 실리주의자나 절약충이라고 거리감을 두거나 싫어하진 않았다. 어차피 주로 경각심을 가지자는 캠페인 수준의 경고와 잔소리의 역할일 뿐, 실제로 패널티를 받기까지는 벌점 컷이 너무 높았다. 그냥 이번달에 아는 친구가 검열원(?)이 됐다고 하면, “How is your police thing going? kkkkkkk” 이러고 넘어가는 정도.

당연하게도 같은 나라 출신끼리만 어울리는 애들이 우범지대였다. 어떻게든 단속하는 애들과 선생들을 피해서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남미 스페인어, 남미 포르투갈어, 독일어, 이태리어, 프랑스어(제일 심하게 말 안듣는) 등등을 신나게 떠드는 애들도 있었다. Chiemi는 어찌보면 너무도 뻔하게 그랬다. 맨날 같이 속닥속닥하는 다른 친구가 같은 일본인 여자애 둘밖에 없으니. 나는 Chiemi에게 ‘여기까지 와서 수업시간 빼고 계속 일본어 쓸거면, 그게 무슨 돈지랄이냐고(물론 놀랠까봐 이렇게 말하진 못했다)’ 몇번을 잔소리했지만, 항상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다른나라 애들 영어는 못 알아듣겠고, 분위기랑 생긴게 낯설어서 말을 못 하겠다고. 어우 속터져.

어떤 되게 Chiemi처럼 따분한 날이었다. 아직 주중 평일의 한가운데, 수업 끝나고 별다른 계획도 없고, 간만에 하숙집에 일찍 들어가서 토론토 엄마한테 효자노릇이나 해야되나 하고 생각하던 찰나. 점심시간에 역시나 또 익숙한 그 무리로 속닥속닥하는 Chiemi 포착. 일부러 얘기가 안 들리는 척 하면서, 집에서 싸온 커다란 수제피자 조각을 한번 더 전자렌지에 돌리러 지나쳤다. 역시나 일본말이다. 저걸 저렇게 조용히 소근거리면서도 엄청 빠르게 말할수 있는거구나 싶었다. 그리고 당연히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없다. 내가 아는 일본어는 열도의 야동어(…)밖에 없으니. 그러다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같은 테이블 옆에서 도시락을 까고 있는 이달의 단속왕 친구 Gui(Guilarme,길라르미 어쩌고 하는 기이한 이름의 약자)에게 딱지 한 장만 빌려달라고 했다. 사실 묻고나서 대답도 안 듣고 부욱 찢어서 뺏었다. 그리고 거기에 썼다. ‘5PM, @Timothy’s, w/o ANYONE, NO EXCUSE’(다섯시, 티모시 카페, 아무도 데려오지 말고, 핑계 ㄴ). 단속용 빨간 매직으로 아주 강렬하고 단호하게. 그리고 일부러 한 번 접었다.

피자가 렌지에서 다 돌았을 무렵, 꺼내러 가면서 갑자기 Chiemi 앞에 훅 끼어들었다. 옆에 있던 모르는 일본 여자애는 지가 더 놀라고, 그 옆에 있던 Yuka는 원래 내가 익숙하니 자기한테 뭐 물어보거나 부탁하려고 하는줄알고 그냥 나를 쳐다본다. Chiemi는 역시나 또 놀란 다람쥐눈이다. 귀엽다. 그리고 딱지를 줬다(?).

그때의 그 놀라움과 배신감이 뒤섞인 눈빛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너무 웃겨서 웃음을 참으려고 내가 더 눈물이 글썽했다.

-You…You… didnttellmeyouaretheticketguy… how… T.T
-Rules are rules. Sorry for not letting you know.

역시나 예상 가능하게도 동아시아계 범생이들은 ‘벌점’, ‘오답’이런게 청천벽력이었다. 나중에 Ana는 어쩌다 그걸 받으면 브라나 팬티에 꽂아넣어버리는(…) 엽기적이기까지한 쿨한 캐릭터였지만. Chiemi도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억울하니까 저렇게 아웃사이더처럼 영어를 빠르게 말할줄이야… 얘도 억울하면 말 빨라지는구나. 최근에도 억울하면 말 빨라지던 어떤 여자가 있었는데. 좀 선선한 계절 이름의.

그래서 내가 그걸 펼쳐보라고 했다. 이미 울기 직전인 상태에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휘적휘적 딱지를 편다. 그러더니 표정이 더 가관이다. 이…뭐…(병?…) 이런 표정. 딱지로 놀란 가슴에 머리도 뒤엉켜버린 표정이라 더 웃겼다. 옆에서 흘긋 보던 Yuka가 말했다.

-Patrick, she is soooo soft and delicate. Do better badass.
-Isn’t it funny btw? kkkkkkk
-Complete idiot kkkkkk

Yuka는 좀 더 씩씩한 버전의 헤르미온느였다. 나중에 나보다 먼저 일본으로 돌아갈 때, 내가 다운타운 일식집에서 오코노미야끼를 사준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렇게 말했다. ‘자기랑은 두어달 더 전부터 수업때 팀플도 같이하고 그랬으면서 한번도 그런 장난을 안 치더니, Chiemi한테 그러는거 보고 솔직히 좀 부러웠다’고. Chiemi는 예쁘고 귀엽잖아. 넌 깡마른 윤리선생님 같고. 물론 웃어넘겼을뿐 이렇게 말하진 않았다.

그러고 시작된 오후수업은 즐거웠다. 그 소심이가 무슨 생각으로 심난할지 상상하는 재미로. Timothy는 학원 옆에 있는 조그마한 카페였다. 거기서 시작하면 어디로 가지. 어디 갈만한 데 없나. 그러다 심지어 문자도 왔다.

-‘Patrick, you were so bad.’
-(ignore)

-‘What is this?’
-(ignore)

수업시간에 폰 꺼내는것도 눈치보여서 굳이- 전자사전을 쓰는 애가, 무려 수업시간에 문자를 보낸다고 ㅎ

-P : ‘It’s class hour. focus on the class. That’s bad bad. Real bad.’
-‘You gave me this strange thing!’
-(ignore)

어차피 말이 길어져봐야 못나온다는 핑계만 들을 게 뻔하다. 그렇게 세네시간이 지나고 카페에 갔다. 일찍 퇴근한 꿀벌 직장인들, 취미로 문학 낭독하는 노인네들 모임이 작은 카페에 꽉찼다. 애초에 이래서 2위로 밀려난 내수 카페 체인점인데도 살아남을 수 있는 건가. Tim Holtons처럼 어린애들이랑 외국인들 바글바글하고 사람 왔다갔다 하는게 싫은 사람들이 피난오니까. 바깥 테이블에 앉았는데, 의자가 하나밖에 없었다. 셰익스피어를 읽고 있는 노인네들 테이블에 남는 의자 하나를 빌리러 갔다. 노인네들한텐 좀 공손하게 말해야될 것 같다.


-Sir, Could I use this chair? If you don’t mind.
-For sure! You are waiting for someone, son?

-Yes, obviously. haha.
-Must be a girl, right?

-Yes, kind of tricky girl.
-Just show her beautiful things, give her beautiful pieces of you. That is all. We old people always say, ‘Life is short’. haha.

-I can’t even more get confident with your advice. I really appreciate about that. That makes me less nervous and relax.
-You will do well. As I see, you are highly educated and socially acceptable. That is not an usual young Asian thing. Interesting. Apology for the common stereotype, by the way.

-Thanks for the compliment and you don’t need to apologize. That is the place we need to work on more.
-Such a lovely attitude.

아… 이 간사한 인간을 보라. 의자 하나 때문에 전교회장모드 혹은 청년홍보대사 모드를 발동시키는 나는 정말 너무나도 간사하다. 그쯤 떠드는데 이미 Chiemi는 와있었다(…). 의자를 냉큼 갖다놓고 앉으라고 했더니 어이없음+화남(?) 같은 표정이다. 여긴 그냥 블랙커피가 제일 맛있다. 텁텁할정도로 진하지 않으면서도 향은 그윽한, 마치 차 같은 커피다. 시켜주고 앉았더니 대뜸 물어본다.
(체력저하와 귀찮음 때문에 영어대사는 생략한다-는건 아니고 그냥)

-어차피 어학원에서 매일 보는데, 왜 불러냈어?
-방금 오후수업은 같이 듣는 게 없어서 못 봤으니까.

-허,
-왜?

-아니 그런 장난을 치는 사람이 어딨어, 놀랬잖아.
-딱지 좀 떼면 어때, 어차피 그래도 니가 제일 벌점 낮을건데 뭐. 목소리도 작아서 별로 들리지도 않게 말하고 다니면서.

-아니던데
-응?

-네가 벌점 제일 낮던데
-아, 난 한국말 안 하니까.

-어쨌든 나빠. 나 갈래.
-어딜가, 나 물어볼 거 있어

-물어볼 게 뭔데?
-일단 있어봐봐. 이거 숙제인데 미리 말하면 안 돼서 그래

-그런게 어딨어
-여깄지 어딨어. 나랑 Old town 가자

-나 오후에 가족들이랑 통화하기로 했어
-여기서 잠깐 하면 되겠네

-아니, 그럼 잠깐만(?) -(@#$!#!@$%^^%&*& 대충 일본말 ㄷ…)
-(원격샤우팅) Mom, It’s Chiemi’s boyfriend!
-미쳤음? -(!@$%&^%&%&%!@ 보이후렌도 나이 !@&*&) (대충 남친은 무슨 얼어죽을 이런 내용인듯….)

한바탕 난리통을 피우다가 카페에서 나왔다. 아까 의자 빌리면서 떠들었던 할매 할배들은 다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래 노인네들한텐 뭐든 재밌겠거니. 지하철을 타고 두세정거장쯤 가서, 시청에서 내렸다. 시청 뒤로 Bloor st.을 따라서 토론토 구 시가지가 있다. 1800년대 건물들이 종종 나오고, 가게들도 다운타운에서 보기 힘든 것들이 있어서 신기하다. 언젠가 길을 잘못 들었다가 풍경이 맘에 들어서 거의 도심이 끝날때까지 혼자 쭉 걸었던 길이다.

점점 길어지기 시작한 해가 이제서야 질락말락 하는 여섯시 좀 안 된 시간. 내 나라도, 내 동네도, 내 땅도 아닌데 신났다. 저기엔 타투 가게가 있고, 저기는 무섭게 생긴 터키 아저씨가 케밥을 판다. 그리고 여긴 악세 파는 집인데 예쁜게 많다. 그리고 저기는 예전 성당이고, 저기는 문패를 읽어보니 어느 귀족의 저택이 있던 영지였다더라. Chiemi는 어이없음+뾰루퉁쯤으로 모드를 바꿔서 또각또각 따라왔다. 겁이 많은 야생 다람쥐를 모이로 유인하듯, 조심조심 하나씩 보여주면서 한참을 걸었다.

그러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게에 도착했다. 울타리, 실내 가구, 바닥, 벽 모두다 새까만 색으로 된 가게였다. 근데 우중충하다거나 무서운 느낌은 들지 않는다. 색깔만 검정색일 뿐, 굉장히 쁘띠쁘띠한 테(?)로 디자인 된 인테리어였다. 그리고 그 검은 바탕 위에 굉장히 색이 진하고 뚜렷한 꽃과 허브들을 파는 곳이었다. 마치 지금의 아이폰 기본 배경화면처럼, 완전히 검은 배경에 굉장히 채도가 높은 그림을 보는 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 거기선 간단하게 커피도 마실 수 있었지만, 우린 어차피 커피는 마시고 왔으니까 허브티를 시켰다. 저번에 봐놨던 예쁜 꽃이랑 허브들 몇개를 보여줬다. 그때까지 별 표정이 없던 Chiemi는 조금씩 활짝 웃었다. 그때였다.

걷는동안 조금씩 지기 시작한 해가, 남북으로 길게 뻗은 도로를 따라 옆으로 누우면서 도로를 금빛으로 덮었다. 옆엔 어떤 무심한 사람들이 둘둘씩 지나가고 있었고, 우리는 테라스에 있었다. 그리고 Chiemi가 내 앞에서 웃고 있었다.

아무일 없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가득차고 나른한 평일 저녁.
더 밝을수 없을 것처럼 빛나던 금빛 세상이, 번쩍, 밝아졌다.

아, 얘가 많이 예쁘구나.

-어땠어? 여기, 이동네
-좋았어. 밖에 이렇게 다니는 거

-그럼 여태 몇달동안 밖에 이렇게 잘 안 다녔어?
-응. 가끔 홈리스도 있고, 음… 길에서 덩치 큰 백인들이나 흑인들이 자꾸 쳐다보고 하면 무서워서.

-에이 그래도 여기만큼 안전한 도시가 어딨다고.
-좀 무서워. 그리고 가게들도 아무데나 들어가기 좀 부끄럽고. 살 것도 아닌데.

-그럼 그동안 뭐했어?
-그냥 (그)친구들이랑 집에서 티비보고, 카페나 도서관 가서 숙제하고, 공원 산책하고.

-그럼 오늘은 괜찮았어?
-뭐가?

-안 무서웠어?
-응. 너랑 있으니까, 괜찮아. 너도 크고, 넌 어디서든 뭐든 말할 수 있고, 할 줄 아니까.

기분이 좋았다. 기분이.

-Ch : 고마워. 예쁜거 많이 보여줘서. … 신난다 ㅎ
-내가 더 고맙지. 혼자 다니면 심심한데.
-너 혼자 안 다니잖아. 맨날 옆에 친구들 엄청 많던데
-아. 걔네랑 다닐때도 있고, 혼자 다닐때도 있고.

-근데, 혹시 이렇게 물어보면 안 되나 싶지만… 나 안 이상해?
-뭐가 이상해?

-그냥, 네 친구들이랑 다르잖아. 네 친구들은 다 키도 크고, 옷도 잘 입고, 말도 엄청 빠르게 많이 하고, 잘 놀고, 엄청 재밌는 애들이잖아.
-그런게 어딨어. 대신 넌 나한테는 얘기 많이 해주잖아. 가끔 잘 삐져서 그렇지. 그리고 너랑 있으면 뭔가 재밌어. 집중하게 되고.

-그렇구나. 다행이네.
-뭐가?
-아, 아니야. 근데 아까 처음에 물어봐야한다는 숙제는 뭐야?

-아, 아. 그거.

내일도 끝나고 집에 같이 갈래?

-… 진짜 그거야?
-응.
-ㅎ…ㅎㅎㅎㅎ… 그래.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