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ng Frame_02
언젠가 썼던대로, 토론토에는 무료 전시가 엄청 많다. 시청에서 공공장소에 하는 건 우리나라도 있으니까 비슷하고. 그런 것 말고도 엄청 많다. 공간을 무료로 대여줌으로써 기부하는 방식 덕분이다. 노는 방으로 에어비엔비를 하고, 노는 차를 공유경제로 쓰는 것처럼. 뜻은 있지만 발이 무거운 건물주님들께서 잠시 임대기간이 붕뜨는 그런 기간에, 지역 군소 예술가들이나 인권운동가들한테 사무실이나 상가를 빌려준다.
그날은 오후수업중에 그런 무료 갤러리로 나가는 일정이 있었다. 서너군데를 연달아 돌아다녔다. 기억나는 곳은 그루지야(=조지아) 출신 사진작가의 전시였다. 카스의 테러리스트처럼, 진짜로 AK 소총을 들고 오픈형 지프를 타고다니는 그런 이미지의 나라. 근데 그건 이미지 뿐만 아니라 정말 그랬다. 러시아랑 싸워서라도 독립을 하겠다는 굉장한 선생님들. 딱히 극단적인 리얼리즘을 표방하며 불편하고 잔혹한 사진만 있던건 아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일상은 스며들고, 다시 엎어지고, 또 살짝씩 피어나려고 하는 일상. 그 일상과 아비규환의 끊임없는 긴장과 순환을 보여준 전시였다.
Chiemi는 전시를 볼 때 자기 방식대로 천천히 똘망똘망 스스로 캡션을 읽으면서 소화하기를 좋아했다. 선생이나 다른 애들 등등 남이 이것저것 먼저 설명하거나 지나치게 참견해서 그 선을 넘으면, 그마저도 대놓고 내색은 안 하지만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 그냥 그러도록 내버려두었다. 난 한 두세걸음 떨어진 곳에서 천천히 먼저 돌면서 속도를 맞췄다. 사진을 보고 한 번 혼자 생각하고, 캡션을 쭉 훑으면서 ‘아 이게 이거였구나’ 하고. 남는 느낌을 기억하고. 그러고나면 Chiemi도 한걸음 따라오고. 그러면 난 남는시간동안 Chiemi를 구경했다. 눈동자에 글씨랑 사진이 맺힌걸 본다. 뭘 저렇게 열심히 보는거지. 저렇게 오래 눈을 안 깜빡이고 뜨면 눈 안 아픈가. 또 중간에 뭘 끄적끄적 적는다. 재밌고 귀엽다. 난 그래서 전시 내내 두 배로 바빴고, 두 배로 볼 게 많아서 좋았다.
우리나라의 예전 야학처럼 모여서 공부하는 곳으로 애들이 걸어가고, 그 옆으로 무장한 어른들이 무심하게 지나가는 사진이었다. 난 역시 또 사진이랑 캡션을 미리 보고 Chiemi를 구경하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내쪽으로 휙 돌아보더니 눈이 마주쳤다. 어… 음… 어차피 대놓고 보고 있었긴 했는데, 갑자기 마주보니까 오히려 내가 좀 놀랬다.
-파트맄(이렇게 일본식으로 뭉개진 발음이 오히려 좋았다), 이거 문단 하나가 통째로 이해가 안 돼
-왜, 읽기 잘 하잖아
-정치나 인권 이런데 관련된 단어가 너무 많아서. 단어도 길고 낯설어
-아. 여기는 독립찬성-독립반대로 나누어져있다는 얘기야. pro-어쩌고는 그쪽에 찬성한다는 의미 or ‘친무엇무엇’ 이런 느낌. Ground operation은 군사적인 용어인데, 지상군 투입 = 전면전이라는 말. 그냥 군사훈련을 하거나 미사일 몇 방 쏘는것도 단계적으로 취하는 제스처잖아. 근데 아예 지상군이 밀고 들어가면, 주권(Sovereignty)을 무시하면서 작정하고 끝을 보겠다는 뜻이라, 제일 강경한거지. 러시아가 그랬다는 말이고. 이건 요즘 우크라이나도 겪고 있대.
-그럼 우리 일본이 한국이랑 중국에 들어갔던 것도, 그런 의미가 있는 거겠네
-응, 그렇지
-나쁜거구나
-그게 나빴던 건 맞고, 지금 각자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걸 개인이 뒤집어 쓸 책임까지는 아니고. Chiemi 너는 그당시 그런 선택을 했던 사람들과 생각이 같아, 아님 달라?
-달라. 다른 것 같아.
-그럼 ‘그때의’ 일본 잘못은 맞고, ‘지금의’ Chiemi 잘못은 아닌 거
-그렇구나. 명확해졌네
아직 사진이 좀 남아서, 자연스레 대화를 마치고 원래 보던 앞칸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뭐가 툭 걸렸다. 난 옷은 좀 타이트하게 입으면서도 뭔가 하나쯤은 주렁주렁하거나 예쁜걸 걸치고싶다. 그날은 좀 걷다보니 봄 치고 더워져서, 위에 입었던 셔츠를 백팩 한쪽 어깨끈에 걸쳐놓고 허리춤에 걸린 망토나 술(…)처럼 주렁주렁 찰랑찰랑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마 그거였나보다. 뭐가 툭 걸려서 쳐다봤다.
…
너무 귀여워서 하마터면 와락 끌어안을뻔했다.
그 조막만한 손으로, 늘어진 내 셔츠자락을 살짝 꼭(?) 붙잡고 있었다.
’얘가 왜이러지’ ‘뭐하자는 거지’…. !@$%%^%&&!@!@&*…
맨날 선빵만 치다가 한 대 맞으니까 오히려 머리가 더 엉키며 고장나는 쪽은 이쪽이었다. 아니 내가 왜 이러지. 방해 안 하려고 기껏 거리를 줬더니만.
-…?! 왜?
-아니, 사진좀 같이 봐. 아까부터 간신히 따라가는데 왜자꾸 도망가. 좀 천천히 보면 안 돼?
…?... ... ?!
-음… 혼자 편하게 보라고. 귀찮게 하면 또 인상쓸거같아서(make your ‘that’ face).
-물어볼 거 많았는데. 그래서 여기 단어카드에다가 다 써놨어
손바닥만한 카드다. 어디 일본에서 사온 것 같은 조그만 카드겸 수첩. 고등학교 때 능률보카 외울때도 눈으로만 외워서 혼나고 안 썼던 카드인데. 저걸 진짜 쓰는구나. 그와중에 저 조막만한 크기가 너무 귀여웠다. 거기에 깨알같이 써있는 단어들.
…
너.무.귀.엽.다.
세.상.에.나.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같이 보면서 속닥속닥 물어보고 알려주고 했다. 나도 어렴풋이 뜻만 아는 단어와, 어디서 주워들은 맥락들을 가지고, 쉬운 단어로 풀어서 내 말도 아닌 남의나라 말로 설명하려니 솔직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래도 그런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이 야생다람쥐가 내 셔츠를 잡았다. 그 조막만한 손으로. 따라오고 있었단다. 안 올줄 알았는데.
그러다 선생이 날 불렀다. 여기 메일링 서비스에 메일 남기고 가면 뉴스레터도 보내준다고. 너 이런거 관심 있다며, 한 번 써봐. 작가한테 인사도 하고, 이런저런 설명을 들으면서 그걸 쓰고 있는데 시간 됐다며 나가자고 했다. 어찌어찌 떠밀려서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가 먼저 내려간 Chiemi랑 찢어졌다. 그새 옆에 온 다른 친구녀석들이 끝나고 메디슨 펍 가자고, 가슴큰 애들 많이 온다고(…) 헛소리나 하면서 웅성웅성 떠들기까지 한다.
아… 오늘은 같이 가자고 작업 안쳐놨는데. 먼저 갔으면 어떡하지.
역시나 내려갔는데 없다. 물어볼거 그렇게 많다며 가긴 되게 빨리 갔네.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혹시 급한일이 있어서 간건가 싶어서 냅뒀다. 에라이, 집에 가서 조니워커나 따라놓고 영화나 봐야겠다. 한참 좋다가 김새서 나가 놀 기분도 아니고.
갤러리에서 집에 가는 길은, 전차(Street car)를 타고 지하철역까지 한 번 가서 지하철로 환승을 해야했다. 사람들에 섞여서 정류장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거의 다 도착했는데, 익숙한 그 앞머리, 익숙하게도 그 따분한 유사교복차림, 구두도 단화도 아닌 따분한 신발이 눈에 띄었다. 아니 얘 오늘 왜이래. 사람 잡을 일 있나.
-뭐야, 간 거 아니었어?
-아, 나도 한 번 해볼려고. 너 놀래키는거 ㅎㅎ…
-나 여기로 올 줄 어떻게 알고 그냥 없어져
-저번에 네가 Islington 역 근처에 산다며. 구글맵이 여기서 전차 탄다던데
-너 이거 타면 니네집이랑 반대편이야
-그냥 좀 돌아가지 뭐. 어차피 이거 물어볼거 이만-큼 있어서, 너 집에 갈때까지 다 못 물어볼수도 있어
-허, ㅎ,,, 허;,,, 알겠어. 일단 왔다. 타
내가 호랑이를 키웠구나. 키워서 잡아먹히는구나
창가에 앉히고 옆에 탔다. 안 그래도 유사교복처럼 입었는데, 전차까지 타니까 이건 흡사 20세기 초, 1900년대 초반 어디쯤인 것 같아. 이러다가 과거로 타임슬립 당하면서 납치되는 건가.
그때, 그놈의 노을이 또 문제였다.
지평선 옆으로 기울던 해가, 전차 창가로 금빛 레이저를 쐈다.
Chiemi 앞머리는 햇빛을 받아서 금색으로 빛났다. 내가 언젠가, 그렇게 왕창 다 빗어내리는 것보다, 약간 비대칭으로 후까시(...볼륨이라고 대충 순화했다)를 좀 주는게 세련되면서도 똑똑하고 예뻐보인다고 했더니, 그렇게 하고 나온 앞머리. 눈은 햇빛을 받아내면서 갈색이 더 신비롭고 깊어졌다. 치사하게 눈으로 이러는 건 반칙이지. 그 아래 세상 착하게 생긴 코랑 입술, 그 아래는 노을 때문에 약간 노란 빛을 띠는 하얀 블라우스, 그게 목까지 잠겨있는 단정한 모양새. 그 뒤로 보이는 Spadina의 옛 건물들과 거리들.
움직이는 그림이 담긴, 움직이는 액자 같았다.
Mov-ing frame.
어쩌다 한번씩 얘는 왜 이렇게 사람한테 이렇게 스턴이 걸리는 순간을 쏘는걸까. 뭐지.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파트맄, 이거 뭐냐구 이거
-응?
-아까부터 왜 대답을 안 해
-아니 그렇게 작게 말을 하면 들리겠냐, 여기 얼마나 시끄러운데
-그래서 이거 뭐야?
-아니, 가만히 있어봐
-뭐해?
-아, 창가 보고 있어. 그대로 있어봐
-뒤로 좀 기대서 잘 보이게 비켜줄까
-아니, 가만히 있으라구. 그냥 가만히
Chiemi는 조금 더 지나니 조금씩 볼이 빨개졌다. 그래도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서, 그 눈동자에 바깥세상을 비춰줬다. 신기했다. 움직이는 액자 같다. 이 풍경.
말없이 40분이 넘게 그대로 액자를 구경하며 집까지 갔다.
내가 거꾸로 데려다준다거나, 온 김에 동네에서 밥이라도 같이 먹고 가라고 했는데, 오늘은 정말로 저녁에 그쪽 홈스테이 가족들이랑 같이 식사하기로 했단다. 이미 이렇게 확 돌아오는 바람에 바로 가야한다고. 정작 그래놓고 이런다.
-네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이거 하나도 못 물어봤잖아
-내일 물어보면 되지
-내일은 내일 또 물어볼 거 생기는데
-내일까지 거기다가 물어볼거 더 꽉꽉 채워와. 숙제야
-ㅎㅎ…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