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적 어그로_01
재무직으로 일할 때는 손으로 오타를 치는 것과, 눈과 머리로 오판을 하는 것에 민감했다.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 내가 업무 로드의 양적인 병목이거나, 질적인 결함이 되진 않을까 하는 생각들.
어쩌면 내가 있던 부서는 ‘사람, 특히 임원 직전까지의 피라미드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 중에 가장 끝’에 있으며, ‘기계와 임원이 하는 일 중에 가장 처음’이기도 했다. 시점상으로 썼거나 벌었다, 쓸거나 벌거다. 작게는 점심시간에 법카로 긁는 스벅 커피부터, 크게는 수백/수천억을 쓰면서 그 이상의 수백/수천억을 벌어야 하는 것들. 새로운 제품 라인 개발 프로젝트나 해외 지사 확장, 지방 대규모 매장 건설 및 오픈, 자회사 분할/합병 등. 현장과 전방 부서부터 차곡차곡 단계를 타고 올라온 정보들이 본사로 모여든다.
다행히도 작지 않은 회사라서, 어떤 단계에서도 ‘[경리]직원이 [영수증을 풀로] 붙여서 마감한다’는 원시적인 형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시스템화 되어있지 않은 채널로 발생하는 거래라던가, 거래형태 자체가 규격화 돼있지 않고 일상적이지 않은 무수한 내/외부거래는 결국 사람이 처음 한 번은 입력하고 건드리게 되어있다. 매장이 4800개, 자회사가 20개, 본사에만 부서가 50개. 내 앞으로 어떤 숫자나 기안문이 도착하기 전까지 각 단계별로 ‘재무 어쩌고’를 달고있는 사람들이 대충 일곱 단계. 지뢰밭이다. 어디서 누가 틀릴지 모른다. 그리고 그 틀린 숫자 하나가 체계를 타고 들어가서 같이 휘몰아치는 순간, 오염이 섞이고 섞인 연쇄는 틀린게 틀린 것을 만들어내고, 그 두번째로 틀린게 세번째로 틀린 걸 만들어낸다.
물론 그런걸 상호검증 하라고 그 무수한 결재라인이 있는거겠지. 그런데 사실 다들 잘 안 본다. 각자의 뒷단에는 그걸 ‘정말로’ 신경쓸 누군가가 또 한명씩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임이 밀리고 밀리다가 마지막에 도착하는 곳이, 그들이 보기엔 ‘높다’고 생각하는 그 상위부서, 우리였다. 그래서 우리에겐 우리 부서가 높다는 말이 오히려 기만적이라서 별로였다. 높다기보단, 뒤가 없는 낭떠러지에 더 가까웠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데이터를 검증하고 우리 이름이 들어간 전자결재를 갈겨버리고 나면, 그 숫자 그대로 ERP에 지울수도 없게 들어가서 신나게 숫자가 돌아버린다. 그리고 그건, 바로 임원진에게 전달될 분석자료로 신나게들 써먹거나, ‘언론’에 ‘공시’된다.
당신들이 틀리면, 바로 차상위 관리자 혹은 차상위 부서한테 전화로 ‘짬이 얼만데 아직도 이런걸 틀리냐’고 핀잔을 듣는 걸로 끝난다. 근데 우리가 틀리면, 아침 여섯시 사십 오분에 회장님 쌍화차와 함께 회장실에 들어가야 한다. 잠도 안 깼는데 빡친 노인네를 상대한다는 게 얼마나 버라이어티한지 궁금한가?. 혹은 경쟁사를 포함한 상장사 전체한테 쪽팔리게 ‘수정/정정 공시’ 같은걸 대문짝만하게 걸어야 한다던가 하는 상콤한 경험.
그래서 손과 머리가 항상 깨어있기를 바랐다. 엑셀과 ERP, 전자결재를 포함해서 하루 평균 40만 셀 정도를 본다. 그리고 대충 500셀 정도는 틀린걸 고쳐서 빠꾸먹이거나, 내가 새로운 걸 만드느라 직접 쓴다. 그러다보면 숫자패드에 올라간 손이 춤을 춘다. 안 보고도 백억대 숫자부터 1의 자리까지 전혀 막힘없이 우다다다다다다다다닥. 오, 나 숫자 좀 다루는 프로같아 이제. 그 느낌이 드는 어디쯤부터 슬슬 틀리기 시작한다. 방심이다. 머슬메모리는 양날의 검 같아서, 비슷한 숫자 조합은 이전에 입력했던 익숙한 손의 모양대로 그 조합이 자동완성처럼 돌아간다.
이전에 들었던 음악에서의 예와 비슷하게도, 확 틀린건 금방 티가 난다. 근데 뭔가 ‘비슷하게’ 생긴채로 그렇게 틀린 건, 나중에 다시 찾기도 힘들다. 하물며 거기에 함수를 대여섯겹쯤 걸고, [드래그를 했다면] [피벗을 돌렸다면] [차트까지 예쁘게 뽑았다면]. 수고링. 그래서 뭔가 무념무상으로 익숙해진채 제로의 영역에 들어간 것 같은 무아지경이 되면, 그때마다 옥상 가서 반포 한강공원 한번씩 내려다보고, 세수하고 왔다. 아- 몇시간 있으면 저기로 또 출근하고 있을텐데. 젠장. 뻐킹 구반포역, 동작역. 아니다 차라리 저기로 출근하는거면 적어도 출근할 때는 대중교통이 있는 시간이라는 얘기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출근할 때도 택시타는 날보다는 낫다. 브라보. 정원아, 우리 남/녀 기장이니까 동기들한테 뭐라도 해줘야하지 않을까. 시덥잖은 문자. 스스로 저질러놓고도 바빠서 감당도 못할 수작질. 아차 싶지만 이미 늦었고, 에에에라 모르겠고. 그와중에 나란 놈도 참 부지런하고. 그리고 다시 한 층 내려가기.
머리쪽에선 기가 막힌 기술들을 구경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떤 업계의 어떤 직무든 당연한 거지만. 우리처럼 매 건마다 씨름해보지도 않은 부장과 이사는, 가끔 중간 결과물을 스윽-보면 이렇게 말했다. ‘숫자가 좀 튀네’. 처음엔 그냥 평소와 다르게 작거나 크다는 감상평인 줄 알았다. 나중에 알게된 의미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나왔어야 할 숫자’의 와꾸를 대강 알고 있는 상태에서 보기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 그게 너무 신기해서 어느날 퇴근길 부장 차를 얻어타고 지하철 역까지 가는 길에 물어봤다. 그걸 어떻게 아시는 건가요. ‘재윤, 우리한테 모든 결재를 열람하는 권한을 괜히 주는 게 아니야’. ㅇ ㅏ … 오키;. 보라는 얘기구나.
그 전까지는 어차피 회사의 내부사정을 잘 모르는 더더더 쪼렙이었으니, 그냥 기안문의 양식이라던가, 적당히 아재같이 무게감 있면서도 씬박한 표현들을 좀 참고하는 수준이었다. 근데 그때부터 목적을 가지고 내용을 제대로 읽다보니 이건 흡사 시트콤이었다. 온라인 사업부에서는 네이버에 광고를 걸려고 예산을 지들 멋대로 책정했다가 막판에 회장한테 뺀찌먹어서 이번엔 아무것도 못한다더라. 그럼 1억이 남겠군. 생활용품 사업부에서는 재고를 20억씩 쳐박아놓고도 못 판다고 털릴 게 걱정되니 숨기다가 걸려서 이번 분기에 다 반영한다더라. 저건 골로 가겠군. 부산 센텀시티랑 수원 직매장은 매출 뻥뻥 잘 나온다고 지들 멋대로 프로모션을 기획했는데 망했구나 - 곧 직매장 사업부에서 반성문 써와가지고 사후대책 어쩌구 하면서 돈 더 달라고 하겠구나.
아, 이래서 그런거였구나. 갑자기 무뜬금 전화한 모든 사람들은, 항상 우리가 ‘다 알고 있지 않느냐’는걸 전제하고 얘기를 시작했다. 나는 그때마다 ‘잠시만요, 확인해볼게요’. 라며 멍청미를 뽐냈는데. 그 뒤로는 그런 게 보였다. 굳이 직전의 값이나 평균값과 비슷한게 아니더라도, 이번에 뛰었어야 할만큼의 숫자가 안 보인다던가. 그런 거. 오. 머시써. 응 당연한 거야 바보야. 이것만 가지고 한참을 으스대며, 이젠 뭘 좀 아는 짬이 생긴듯 으스댔다. 그러다 어느날, 다시 한 소리를 들었다. 뭔가 조폭 집단에 있을것만 같은 성씨-직급 줄임말. 장이사.
회의중. 오늘은 어떤 선배가 털릴지 각을 재보며, 그동안 나는 또 얼마나 이 회의에서 모르던 걸 많이 알게 돼서 듬뿍담뿍 성장할지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신나게 집중하며 펜으로 필기를 휘갈기고 있었다.
근데, 기습이다. 앗차…
-야, 한
-Nep
-너 그래서 이거 어떻게 해야될 거 같아?
-네? 어, 그건…
-너네 숫자 짜맞추고, 마우스로 따각따각 결재찍고, 자료 이쁘게 찍어내라고 데려온 거 아니잖어?
-네, 그렇죠
-그런건 촉탁사원(고졸 계약직)들이 하는건데, 그거 하라고 굳-이 대졸공채로 뽑아서 그 돈 주는거 같아?
-아니죠
-생각을 하라고. 뭘, 어떻게 해야 뭐가 얼만큼 나아질지. 이거 봐봐, 얘네 중국 나간지가 벌써 5년이야, 근데 이거 숫자 어때
-어셋 턴오버가 낮고, 이자보상배율도 낮습니다.
-한마디로, 한마디로 뭐야
-이자 엄청 주고 비싼 돈 빌려와서는 장사 제대로 못한다는 상태…입니다
-그래, 그럼 그 다음은
-네?
-뭐가 문제야 그럼 저거
-장사를 제대로 못한다는 상태…가 문제인듯 합니다. 이자비용은 어차피 공통 환경요인이라 현지 경쟁업체들이랑 비교해도 상쇄되는 로스이고, 초기 진입이라 딱히 다른 대안도 없을테니까요
-그러니까 장사를 못하는 걸 파고들어가면 뭐가 문젤까
-잘 못 만들거나, 잘 만들어놓고 못 팔거나 둘중 하나입니다
-그거 확인해서 내일 모레까지 가져와
-ㅇ ㅏ … Nep
-니가 잘 하면 쟤네가 까먹었던 600억 버는거고, 탱자탱자 놀면 다음 분기에도 600억 중국 땅바닥에 버리는거다잉
-알겠습니다
내 1년 선배이자 사수는 그날 하루종일 웃었다. 그리고 밤에 집에 가는데 그랬다. ‘재윤씨, 대답을 너무 잘 해서 일이 생긴거에요. 근데 그렇게 하면 금방 늘더라. 힘내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상태. 사실 이렇게 말하면 그간 나름의 노력이 너무 억울했지만, ‘어떤 맥락’에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상태로 일을 했었다. 그걸 자각했다. 그날 기분이 더 묘하고 이상했던건, 저 사람은 은근 나같은 사람이라는 거다. 저 장이사. 내가 후배들 저렇게 가르쳤는데. 그말인즉슨, 내가 남한테 하듯, 내가 나한테 물었어야 했다. 니 생각은 어떠냐고. 정확히 뭐가 어떻게 문제냐고, 드릴다운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