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on Fossel 2021. 7. 29. 02:31

이런저런 카더라의 척척박사는 많다. 백신 개발사도 아직 임상을 미처 충분히 하지도 못하고 낸 백신이라 후속 연구나 실험이 진행중인데, 이미 성능을 아이템 옵션처럼 줄줄 꿰고 있다. 아직 뉴스에 나오지도 않은 얘기인데, 뭐는 어떻게 될거다 등등. 하지만 그들에게 ‘피셜’ 데이터를 물으면 갑자기 데꿀멍이 되는 웃지못할 풍경이 벌어진다.

얼마전 엄마한테서 어떤 장문의 복붙 카톡이 왔다. 전) 질병관리청 소속 ‘OOO 박사님’의 글이란다. 내용을 읽어보니 정부와 뉴스가 하는 말은 믿지 마라, [코로나는 그것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메세지였다. 마치 어떤 ‘권위자’의 ‘내부고발’과도 같은 형식의 ‘경종을 울리는’ 분석과 여러 생활수칙들이 써있었다. 일단 대뜸 정부와 뉴스를 믿지 말라고 하는 지점부터 본능적으로 사짜 느낌이 났다. 하지만 구라를 치더라도 ‘더 조심하라’는 쪽으로 구라를 치는거니까 부작용은 차라리 덜 심하겠거니 싶었다. 읽어보니 거의 핵폭발 이후 낙진에 대처하듯, 어떤 종류의 노출과 터치도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식의 수칙, 정부와 언론에 등장한 코로나와 그 예방책 및 해결책(백신 포함)은 눈속임이라면서 어떤 다른 수치들을 제시한다. 설마 하면서 읽던 글의 마지막에는, 역시나 보고싶지 않았던 익숙한 워딩이 눈에 들어왔다. 태극기(부대)를 상징하는 그것들이었다.

출처를 물었다. ‘엄마, 이거 어디서 누가 보낸거에요?’. ‘어- 너네 고등학교때 엄마들 친목모임’. 엄마와 1차 출처의 인구통계학적 , 사회적 특성을 토대로 그 전 단계들을 예측해봤다. 50-60대 중년, 여성, 대충 들어서 알고있는 구성원 각 가구의 평균소득 정도는 30퍼센트의 중산층, 50퍼센트의 적당한 서민, 20퍼센트의 생계가 조금 빡빡한 서민층. 가장 가능성 높은 취미나 관심사 위주의 모임은 골프, 등산, 친목회, 본인이 고용되어있거나 고용주인 전-현직장, 그리고 그 나이대의 친지들. 특정할순 없지만 대충 그쯤 어딘가였겠군.

한국을 제끼고 나머지 전체를 보려면 구글, K-특화 지식이나 현상을 보려면 어쩔수없이 네이버. 그래서 저 소속/직책을 양쪽에서 다양한 쿼리 조합으로 검색을 돌렸다. 그냥 대기업에 다니는 고위급 인사 정도는 안 나올수도 있다. 하지만 ‘학위자’는 말이 다르다. 무조건 두세겹의 인물정보 DB 어딘가에는 자타의 무엇이든간에 등재되게 되어있다. 없었다. 그리고 각종 기사와 게시글 결과. 역시나 저 찌라시와 인물의 정체를 묻는 글들이 수두룩하며, 이미 1년도 더 전에 뉴스에서 팩트체크한 결과 질병관리청에 그런 인물은 재직중이지도 않고, 재직했던 적도 없다는 기사까지 나있다.

내용을 봤다. 어디선가 봤던 통계들이다. 마침 일하다 중간에 저녁시간이길래 대충 밥먹으면서 구글링해서 원본을 옆에 대조해놓고 봤다. 흔한 수작질이었다. 글의 퀄리티를 보건대 글을 쓴 사람이 이정도 품팔이를 할 열심과 지능이 있을것 같진 않고, 역시나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고쳐놓은 숫자를 갖다썼겠지. 숫자를 다루는 전공과 직업을 가져본 결과, 숫자는 간혹 참으로 간사하다. ‘숫자’는 ‘객관’이며 ‘사실’이라는 무비판적인 숭배가 갖는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굳이 위조지폐처럼 초보적이고 파렴치하게 숫자를 대놓고 바꿔치기 하지 않고, 정확히 같은 Raw data를 가지고도 거기에 의도가 섞이면 전혀 다른 해석을 유도할 수 있다. 퍼센트 증감이나 그래프가 가장 쉽고도 강력한 도구이다. 비교 데이터의 전체 범위(Range)를 줄이고, 범주(Class, 도수분포표에서 한 계급의 크기를 생각하면 된다)값을 크게 설정하면 어떤식으로든 상대적 변화량(델타,d; 가장 대표적으로 백분율 숫자의 크기와 그래프의 가시적인 차이)은 커진다. 그리고 그 데이터 범위를 어디(혹은 어느 시점)에 타게팅하냐에 따라서 본인에게만 유리한 근거로 연금술하는 과정은 끝난다. ‘어디’를 타게팅할지, ‘얼마나’ 범위와 범주를 설정할지. 모두 의도가 관여하는 지점이다. 따라서 이미 객관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괘씸했다. 영화에서, 그리고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현실 양쪽에서 국민들이 들었던 그 말. ‘국민은 개돼지’라는 발상에서 나온 행동. 대충 어쩌고 ‘박사’라는(so called) 사람이, ‘어려운 말과 숫자’로 조지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는 것보다 더 심한 개소리를 해도 일단 옳다구나 하겠다는 그 얄팍한 생각. 더 분한건 그들의 계산이 어느정도 들어맞긴 한다는 것이다. 원치 않았지만, 대중은 실제로 어느정도의 우매함 혹은 지적 나태함이 있었다. 내 부모와 상당수의 지인들도 거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 국민중 하나인 나도 ‘개돼지’ 취급을 받는 거였다. 물론 그렇지 않은 다수의 대중도 있었고, 그 비율은 예전에 비해 현저히 높아졌기에 자정작용이 있다는 것 역시 간과해서는 안되는 지점이긴 하지만.

출처는 불명, 전자철수와 전자영희가 이상한 목소리로 텍스트를 읽는(저퀄TTS) 가십과 음모론의 유튜브 영상조각 한두개가 ‘피셜’ 데이터보다 힘을 가지는 이유가 뭘까. 유권기관 자체와 그 기관이 생성하는 정보가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최근의 경제수준과 교육수준에 비해  기이하게도 이미 신뢰를 잃은 기억이 너무 많다. 앞서 언급한 ‘유권기관’을 주로 ‘행정부’를 지칭한다고 거칠게 치환한다면, 그 ‘행정부의 수반’이자 무려 5스타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행정부의 심장이자 머리꼭대기에서부터 본인도 놀아나고 나머지 전체를 농락했다는 최근 수년 전의 그 사건. 기대와 실망의 역사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지난했다. 대통령 혹은 그 측근의 실정이나 비리도 오히려 지루할정도로 거르지 않고 일어나온 일이다. 다만 그 사건이 다른 케이스와 다르게 괘씸함을 넘어서 치명적인 이유는, 이 시스템 자체가 처음/기반부터 과정과 결론까지 다 거짓이었다는, 신뢰의 붕괴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유권기관이, 정부가 양치기 소년이 되었다.

하지만 무려 정부와 언론을 저따위로 막돼먹은 사람들이 얄팍한 눈속임으로 완전하게 부정하는건 상당히 오만하다. 정부를 그정도로 무시하려면 정부의 부패만으로도 나라가 망해버린 베네수엘라나 멕시코 혹은 소말리아쯤은 되어야 한다. 언론을 그렇게 불신하고 업신여기려면  군사정권시대의 한국, 지금의 북한이나 중국, 그리고 미얀마 정도가 되어야 가능하다. 하다못해 코로나 대처를 똑바로 못해서 안 그래도 가난했던 국민들을 굶겨죽이는 나이지리아 정부도 Human Rights Watch에서 대뜸 폭풍질문을 당돌하게 꽂아넣자, 결과는 답답하더라도 답변 자체는 꼼꼼하게 숫자와 격식을 채워넣어서 대답한다. 당신들이 업신여기며 농락할수 있다고 자신하는 현재의 대한민국은, 정말로 이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그런’ 국가의 국민이라는 걸 스스로의 행동으로 보여주는 건가.

우리가 매일같이 세금 먹고 싸움질만 한다는 그 정당과 국회의원들은 그렇게 싸움질을 하면서 ‘일단은 반대’하고 보기 때문에, 상대 정당과 대통령(행정부)이 똑바로 하는지를 ‘먹고살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눈에 불을 켜고 볼 수밖에 없게 만들어져있다.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무능하고 썩어버리자, 주권자인 국민들은 청와대로 돌진해서라도 대통령을 끌어내렸다. 언론이 예전처럼 편파적으로 선넘은 개소리를 하거나 편법을 쓰면, 언론사가 언론사를 깐다. 또는 그러면서도 서로를 완력으로 없애버리지는 않는다. 어떤 목소리를 내고, 얼마나 작고 보잘것 없는 언론사일지라도. 이 모든 건 당신들보다는 최소한 배울만큼 배운 사람들이 한다. 이 순간에도 물론 함량미달의 능력과 도덕적 기준을 보이는 인간들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적인 건, 그런 사람들이 나머지 모두를 통수치는 짓을 그렇게 오래 해먹지는 못한다. 우리 사회는 현재 완전하지 못하더라도, 항상 완전을 위해 다가가고 있다. 당신들이 시스템을 우습게 알고 나대기 위해서는 이 모든 과거와 현재의 노력과 능력을 부정해야 한다.

유사이래로 근현대까지 반복된 어떤 플롯이 있다. 천재지변이건 인재이건, 공익보다도 특정 사익이 우선하는 집단은 그런 환란을 틈타 의도적인 공포를 조성한다. 그런 공포에 노출된 대중은 형태와 채널은 다르지만 결국은 미신적인 정보와 수단에 의존한다. 그리고 그런 아비규환은 불안을 먹고 자라서 신뢰와 안정을 좀먹는다. 그렇게 무주공산이 된 세상에, 차선이라기에도 빈약하고 역겨운 어떤 것이 깃발을 꽂는다. 익숙하다. 홍수가 닥쳤을 때 물을 막으려 쌓은 둑이 완전히 터져나가는 건, 처음의 균열 때문만이 아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그 균열을 더 벌리는 어떤 후속타이다. 균열과 붕괴를 가속하는 그 추가적인 액션이 결국은 파국을 지수적으로 가속하여 앞당긴다. 혼란을 틈타는 짓거리가 단순히 비열함을 넘어서 치명적이고 악질적인 이유는 이런 여파(aftermath) 때문이다.

외교, 경제, 방역 등 어떤것도 완벽하지는 않다. 보수의 실패(라 쓰고 사실은 병크라고 하고싶었다)를 예로 들었다 하여 집권여당인 진보가 뭐그리 잘한다는 것도 아니다. 진보가 기득권으로서 종종 보여주는 허술함과 파렴치함도 그에 못지 않다. 까도 내가 깐다는 느낌으로 오히려 더 눈에 불을 켜고 보게 된다. 하지만 진영을 막론하고 지향점은 같아야 한다. 위기의 극복과 사회의 안정.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공-리. 정부 청사에나 붙어있을 법한 임시 표어스럽다. 여기저기서 균열이 보이자마자 어차피 개판이니 싹다 부수자는 그런 파국화,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 균열이 보이거나 예상되면 똑똑하게 합리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지금은 완전하지 않아도, 지금 이순간에도 완전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믿음과 열심. 항상 깨어서 경계하고, 선한 의지와 능력을 갖추고 실현하자. 우리가 쟁취하고 가꾸어온 문명에의 가능성을 저버리지 않는 것. ‘희망을 잃지 말자’라는 상투적인 표어의 참으로 긴 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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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ll We Rise.
Still I R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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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밀턴의 표어이다.
(이번주말 헝가리도 이겨죠 형, 제발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