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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극복인가?(극복이다)

Neon Fossel 2021. 8. 10. 21:11

한편으로 음악은 극복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주워들은 격언이나 개똥철학, 혹은 진짜 철학의 표현들중에 ‘피투성’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래서 항상 담아두고 생각하는 개념이다.

‘인간(혹은 존재)은 세계에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던져졌다’.

뭐, 부모가 낳을때 나한테 ‘너 여기 던전 입던할래?’라며 물어보고 낳은게 아니니까 너무 당연한 소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저 명제는 인류가 고대부터 현대까지 켜켜히 쌓아온 은근히 많은 사고방식과 목적의식, 사회의 기반을 근본부터 흔들거나 극복해버린 표현이다.

내가 목적 없이 그냥 질러진, 던져진, 덩그러이 그냥 있고, 그래도 별로 상관 없는 존재라는 건, 사실 굉장히 공황적인 공포이다. 그 공포를 달래거나 덮으려 누군가들은 종교를 만들었고, 누군가들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같은 구실을 만들어서 사회에 공급했다. 종교를 만든 사람들은 신이 창조했다면서 그 목적은 선행,포교/혹은 끔찍한 전쟁이라는 대장정 퀘스트를 사회에 던져줬다. 맞고 틀리고는 둘째치고, 일단은 퀘가 있긴 있어야 했다. 퀘가 없으면 난 만렙찍고 뭐하죠?를 해결하는 것 자체가 그냥 중요하니까.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상, 도덕, 정치, 소득의 증대와 근면이라는 덕목 등. 어떤 것도 내가 ‘저걸 위해’ 정말로 ‘존재 자체를 한다’ 라고 설명되긴 어렵다. 다만 애초에 ‘피투성’이 중세와 근대를 한참전에 극복해버린 세상에 사는 우리나 그게 당연한 얘기지, 저 당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저게 당연한 거였다. 물론, 물리적인 타임라인은 같은 현대에 살고 있지만, 사고방식이라는 다른 타임라인에선 중세를 살고 있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은 건 사실이다.

대략 우리 직전학번부터 취업경쟁이 심해지면서 면접의 기술은 정말 아트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때 내가 준비중에 겪었거나 실제 면접에서 들었던 다른 지원자의 진술중에 가장 간절하고도 웃긴 것도 저런 답변이었다.

‘마케터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
‘기술의 혁신이 평생의 소명이자 소망이다’

너 처음부터 [마.케.터.하.렴.]하고 머리에 딱지 붙여서 생산됐냐. 기술의 혁신은 네가 아니더라도 1:450의 경쟁률로 머리를 디밀고 있는 누군가가 어차피 당연히 할텐데, 너 만약 이짓 못하게 되면 태어난 이유가 없어지는 거 아니야? ㅎ… 저런 표어를 심지어 프로필이나 월페이퍼 등등에 걸고 산다는 후배들이나 동기들, 그리고 요즘도 일하다 만나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는데, 거기다 대고 차마 직접 말로는 못했다. 아무리 앞뒤 안보고 노빠꾸인 나라고 해도 다른 사람의 사고방식이나 사상적 기반을 뿌리부터 후려쳐서 무너뜨리는 건 별로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어차피 들어도 알아듣지 못했거나, 괜히 소모적으로 피곤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같은 교육수준을 누린 사람들한테 너무 오만한 시각이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했다. 근데 어차피 저런 설명이나 갠세이가 필요하지 않은, 몇몇 맘에 드는 사람들은 애초에 저런 웃픈 소리를 스스로도 하지 않거나 무려 써붙이고 다니지도 않았다.

무튼 그래서 ‘피투성’을 인지하거나 받아들이는 건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은 경험이다. 와우에 들어갔는데, 퀘도 없고 진도 빼며 잡을 보스도 없고, 숙제도 없는 거지. 그럼 와우는 그냥 꺼버리면 되는데, 삶은 그냥 꺼버릴 수가 없다. 꺼버렸다간 큰일나지(…). 그럼 그 망망대해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뭘 할까.

음악은 그 시간과 공간을 색칠하고 놀아버리는 행동이다. 오히려 너무 넓어서 감옥과도 같은, ‘피투된 존재들’의 세상. 무엇때문에 오지도 않았고, 그래서 무엇때문에 계속 존재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 황당하고 놀란 존재들의 세상. 거기서 그냥 두리번거리고 주저앉는게 아니라 그렇게 흘러버리는 시간이랑 공간을 무려 일부러 즐겨버리는 거다. ‘피투성’이 중세와 근대의 눈먼 목적의식(주로 안 좋은 쪽으로 악용되었을 때의)을 극복해버렸다면, 그 ‘피투성’을 극복해버린 게 음악이다.

아마 몇번쯤 기록으로 남겼던 면접 썰들에 중복으로 이미 들어가있겠지만

‘해당 직무에 지원한 이유’
‘너를 이 일에 꼭 뽑아야 하는 이유’
기타등등 비슷한 질문에 대한

거의 나혼자만 유일하게 달랐던 대답은

‘난 이게 재밌어서’ 였다.

그리고 심심찮게 잘 붙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면접관들의 표정은 웃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