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on Fossel 2021. 8. 22. 07:33

드럼. 한백이형은 우리 중에 가장 똑똑할 것 같은 인간인데 심각하게 단순하고 멍청하기도 하다. 나보다 한 살 많은데 재수로 꿇어서 학번은 같다. 뭐 진로나 전자기기 혹은 악기를 알아보고 돌아다니고 놀고 하는 건 국내외로 워낙 잘하니 그건 별 문제없다. 다만 일상에서의 스케줄, 이동, 모임, 공연 스케줄 준비 등등 디테일이 없고 항상 주먹구구식에 무사태평하다. 그리고 가장 돈을 잘 벌 수 있는 수학/통계 전공이지만 거기서 응용수학으로 실리콘 밸리나 월스트리트에서 돈을 삽으로 푸는 게 아니라, 학교에서 순수수학으로 논문 쓰고 애들 가르치는 헛짓거리나 하고 있다(...). 서울대를 나와서 미국 대학원에서도 역대 유학생 중에 거의 최연소 기록으로 석박 과정을 마치고 평생 종신직 정교수가 되는 쾌거를 이뤘다. 근데 우리가 보기엔 그냥 바보 내지는 마초 금수(…)놈이다(in a lovely way). 저게 누굴 가르치다니, 저거한테 누가 배우러 오다니, 저 논문을 그렇게나 좋다고 빠는 노친네들이 있다니 세상에. 본인이 박사논문 써놓고 손가락 빨게 생겼을 시절, 절박하게 스팸처럼 뿌린 논문 메일을 보고 MIT가 세미나 오프닝 초청 연사로 불렀다길래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던 적이 있다. 정작 세미나 스탠바이 5분 전에 본인 서피스 세팅이 이상하다고 새벽에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한테 전화했길래 ‘진짜 얘는 좀 모자란가’라고 속과 겉으로 욕을 한 사발 하면서 원격으로 고쳐준 기억이 있다.

이 형은 괜한 교양 오지랖에 관심이 없고, 인간관계는 굉장히 나이스하게 잘 유지하면서도 복잡하거나 어두운 문제에는 지지부진하게 매달리거나 디테일을 챙기는 걸 극도로 꺼려한다. 명랑만화 학원물에 나오는, 굵직한 역경을 헤쳐가며 성장하고, 나머지 자잘한 문제는 별 고민이나 걱정 없이 사는 그런 심플한 주인공 같은 캐릭터. 이쁘장과는 거리가 멀고, 남자다우면서도 길쭉하고 잘생겼다. 그래서 엄청 문란하게 살았을 것 같지만, 엄청 까지는 아니고 사회적으로 용인될 범주 내에서(…) 활발하게(?) 살긴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첫인상에 절대 거절은 안 당하는 정도. 그런 질풍노도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지금 형수랑 연애를 앞뒤로 합쳐서 7년을 했는데, 매 공연마다 보컬이나 기타보다도 드럼이 연락처를 더 먼저 많이 따이는 진풍경을 항상 연출했다. 뒤풀이에선 이 형한테 거의 긴팔원숭이처럼 매달리거나 흡착기로 빨아들이다시피 붙은 채 술이 떡이 된 여자 좀비들을 떼어내는 게 종종 일이었다.

우리 밴드에서는 약간 배기구? 내지는 공기배출구, 즉 압력을 적정상태로 유지해주는 청정기 역할을 하는 존재다. 우리 밴드가 연습 뒤풀이나 공연 뒤풀이에서 보이는 풍경은 이렇다. 보컬 대현이 형은 묘하고 음산하게 어렵게 꼬였고, 기타 정석이는 어둡고 파괴적으로 꼬인 인간이고, 나는 그 둘의 얘기를 그냥 무시하지 못하고 굉장히 섬세하고 어렵게 받아들여버리는(…) 대환장파티다. 그래서 저 형이 있는 게 다행이다. “그래서 그냥 결국은 보이는 것이나 결과 이외에는 의미값이나 진리치가 없다는 말 아니야? 틀린 건 아닌데 좆같은 얘기네. 술 먹어 술”. 이렇게 겁도 없이 한마디로 일축해버리고 우리로 하여금 잠깐씩 의식을 몸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재주가 있다. 이걸 재주라고 해야 되나.

가장 미국적인 삶을 사는 인간이지만, 우리 중에 상대적으로 가장 묘하게 적정 수준의 조선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고 사는 사람이다. 직접 가봤던 미국 집에도 무슨 사군자 같은 게 하나씩 걸려있고, 한국에 있는 아버지와 ‘사람 몸은 그동안 먹고 쓴 것의 합계다. 건강하게 먹고 건강하게 행동해라.’라는 편지를 주고받는, 기가 차는 집이다.

형수는 간호사였다. 형수랑은 초등학교 동창인데 스무 살 무렵 동창회에서 다시 만나면서 냅다 낚아챘다고 했다. 그러다가 미국으로 대학원을 가면서 롱디가 되니, 기본 4-5년은 롱디에다가 아예 눌러살 수도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자유연애도 아닌 것이 그냥 열린 결말로 서로를 열어뒀다고. 그렇게 2-3년쯤을 방학 때만 비행기 타고 넘어와서 만나는 방학 커플을 하다가, 결국 둘 다 다른 사람들을 만났었다.

그러다 형수가 미국에 놀러 간 김에 형이랑 다시 여행을 갔는데, 한국에 있는 의사 남자친구랑 통화하는 걸 보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아서 못 참겠길래 청혼해버렸다고 한다. 자유연애에 열린 결말은 개뿔. 니들 그럴 줄 알았다. 그리고 그 길로 형수는 의사를 버리고(…) 미국의 가난한 대학원 유학생을 따라 천조국으로 냅다 날아가서 결혼하더니 미국 간호사를 했다. 그러다가 형수는 다시 생명공학 대학원을 가서 석박과정을 하고 있다. 형이 석박과정을 하며 조교수로 근무했던 학교와 가까운 곳에서 형수도 대학원을 다녔는데, 형이 정교수를 기어이 따내고 오하이오에서 위스콘신으로 가면서 형수 프로그램도 옮겨야 됐었다. 근데 사실상 옮길 학교에서 기존 석박과정을 크로스로 인정해주지 않으니 여태 2년간 한 걸 다 밀고 다시 해야 하는 상황. 어차피 형도 요즘 수학 쪽에서의 머신러닝을 하고, 형수가 하는 생명공학에서도 비슷한 매커니즘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다니 형이 논문 같이 써주겠다고(…) 하고 데려갔다. 대단한 인간들.

정확히 3주에서 한 달 이내의 기간에 무조건 보이스톡으로 전화가 빗발친다. 내가 내 일정이랑 그쪽이랑 시차 고려해서 언제쯤 통화되냐고 되묻지 않으면 그냥 무한 전화가 온다. 그렇게 통화하면 일은 적당히 하냐, 몸은 괜찮냐, 멘탈은 멀쩡하냐, 엄한짓 하는 거 있으면 이실직고해라, 너는 아무래도 조선에서 안 어울리게 태어났으니 그냥 빨리 넘어와라(…) 등등 부모보다 더 빡세게 잔소리와 질문을 한다. 형이 테라스에 나와서 아이패드로 노래 틀고 위스키 따르면서 그렇게 전화를 하면, 어느샌가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형수가 따라 나와서 인사한다. ‘나도 스피커폰으로 같이해죠 같이해죠 같이해죠’ 참 귀여운 형수다. 가끔은 이 형의 슈퍼심플함과 마초적인 모습 때문에 잊는 사실이 있는데, 이 형한테는 무려 여섯 살 어린 남동생이 있다. 우린 항상 외동인 줄 알다가 놀라는 걸 9년째 반복 중이다. 난 그래서 “난 원래 형제가 없는데, 형이 진짜 제일 심해. 리얼 형이었어도 이거보단 덜할 듯.” 이렇게 푸념한다. 내가 종종 통화나 실제로 만나서 이렇게 말하면, 형은 자꾸 마음이 가서 그런다고(…). 그리고 의외인 건 자기도 그렇지만 형수가 항상 물어본단다. 재윤 씨 잘 지내? 저번에 그건 잘 해결됐대?… …왜?? 왜 궁금한 거지. 저번엔 그래서 형수한테 물어봤다. 그랬더니 형수는 형이 한국에 있을 때 내가 형을 잘 챙겨줘서(…) 그렇다고.

그래서 오늘도, 버스 내려서 걸어 들어오다가 뭔가 쎄하길래 꺾이는 코너마다 랜드마크 위주로 사진을 찍어놨다. 그리고 이 형이 뒤늦게 대충 네이버 지도 찍어놓고 택시 타고 온다길래 예상 도착시간을 앱으로 돌려보고 도착하기 직전쯤 카톡으로 보내줬다. 저거 보이면 좌회전 대충 몇 미터, 직진, 앞에 보이는 건물 끼고 뒤로 들어와서 위로 계-속 오기. ‘이래도 되나-싶을 정도로 들어왔을 때’ 우측을 보기. 이런 식으로. 내가 너를 믿고 즉석으로 설명을 하느니, 차라리 매뉴얼을 만들었다가 던지는 게 편하다. 그래도 사람은 발전과 개선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희망을 보았다. 이번엔 카톡 매뉴얼만 보고 신기하게도 한방에 왔다. 기특하네 교수님.

그렇게 류한백이 등장했다. 세상에 류한백 등장하는 데에, 류한백 캐릭터한테 이 정도의 지면을 할애하다니. 이 길이 자체가 너 놈에 대한 내 애정이다 형 놈… 홀리 지면 낭비. 주원 누나 내가 형수 애정 하는 거 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