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on Fossel 2021. 8. 23. 07:34

역시나 한 시간 늦게 왔다. 언제 어디서 모이든 비슷한 순서와 광경이다. 나 혹은 정석이가 정시 혹은 (+)(-) 15분 정도로 오면, 대현이 형은 +30분, 한백이형은 +30분~1시간 뒤에 헐레벌떡 땀뻘뻘. 오늘은 그나마 대현이 형이 집주인이니까 빼고, 내가 대충 15분 해 먹고, 류한백이 한 시간. 예전엔 이런 습성 때문에 두 시간짜리 연습을 하더라도 합주실을 꼭 세 시간어치를 잡아놨다(…). 뒤늦게 도착해서 우당탕탕 계단을 내려와 스튜디오로 뛰어들어가면 주인아저씨가 항상 그랬다. 남들보다 사실상 합주실을 30퍼 더 비싸게 쓰는, 이런 돈지랄도 돈지랄이 없다고. 나는 좀 매트매트한 마감의 가죽을 좋아한다면, 류한백은 진한 빈티지 색상이면서도 빤들빤들한 가죽을 좋아한다. 그런 커다란 파우치에, 그런 청바지에 티셔츠. 굉장히 막 입었지만 재수 없게 어딘가 멋있는 그런 모양새. 항상 늘푸른 청년 같은 이미지. 반갑다 우리 형. 내 식구. 내 가족.

미국에서 딱히 한인들이 많이 살지 않는 곳에 살다 보니 치킨을 거의 못 먹었는데, 덕분에 처음 격리하는 동안 주원 누나랑 치킨만 여섯 번을 시켜먹었단다. 이번에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은 당연히 처가에서 잔단다. 호오… 니가. 기특하네. 대현이 형은 요즘 혼자 사니까 오히려 피자랑 치킨 시킬 일이 없었다면서 무슨 탕수육 비슷한 튀김옷과 양념으로 된 치킨이랑 피자를 시켰다. 그리고 역시나 ‘너놈들이 이렇게 늦게 올 거 같아서, 식어도 맛있는 메뉴들로만 굳이 시켰다’라며 짬바를 뽐냈다. 그래도 이 형은 요리를 잘한다. 오죽하면 집에서 인도식 카레도 해 먹는 인간이다. 좀 이따가 직접 요리해서 내오라고 땡깡써야지. 오자마자 한백이형도 아까 그 둥글넓적한 글라스에 웰컴드링크를 받았다. 손가락에 끼우고 잔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자마자 내 눈을 딱 쳐다보더니 씨익 웃으면서 입이 우물우물한다. 내가 굳이 완성해줬다.

-‘G컵?’
-ㅋㅋㅋㅋㅋㅋㅋ미친놈ㅋㅋㅋㅋㅋ어떻게알았냨ㅋㅋㅋㅋ
-대현이 형 : 어. 그거 실제로 원래 그거 형상 따서 만든 거래. 사람들이 자꾸 잡기 귀찮다고 놓아버리니까. 체온 실어서 마시라고 일부러 그 모양으로 만들었다던데.
-나 : 역시 인간은 위대하다.

시작은 상콤하게 작년 그맘때 그 집에 들렀던 나의 흑역사(…)였다. 참 광풍같이도 많은 얘기랑 많은 일이 동시에 있었던 날이다. 일부러 욕먹고 혼나러 와서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강도의 뻘짓을 실토해서 대현이 형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지. 거기다 대고 이 형은 의식의 끈을 놓아버리기 전에 굉장히 현답을 해주었고. 류한백은 그 꿀잼컨텐츠에 자기가 없었다고 한탄했다. 그러다 딴따라들 답게 노래를 틀었다. 백만 원쯤 하는 스피커인데, 저 브랜드랑 출력을 생각하면 진짜 싸고 혜자하게 산 거다. 서로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며 블루투스를 뺏어다 자기 기계로 틀어도 되냐고 물었지만, 집주인 대현이 형은 단호했다. 가수-곡을 말하면 자기가 틀겠다고. 이유를 딱히 말하지 않았지만 왜 그런지 나는 안다. 저 인간은 FLAC(무손실)만 듣다 보니 그 아래 음질은 역체감 돼서 못 듣는 거다. 오죽하면 스포티파이도 FLAC까지는 음질 지원을 안 하니까 안 넘어간다고. 작년에 들은 말에서 기억해냈다.

그래서 가끔은 그런 거울 역할을 한다. 나는 저렇게 유난 떨지(…) 말아야지. 음질, 해상도, 맛, 멋 어떤 것이든 옆사람들에 맞춰서 다양한 퀄리티로 잡식할 수 있는 아-량(…)을 갖추자. 그리고 저런 예민함은 다른 사람 문제를 차지하고서라도 본인 스스로가 굉장히 불편해진다. 먹고, 듣고, 보는 것들이 ‘어때야’ 한다는 전제가 자꾸 추가되면, 스스로가 삶을 엄청 꼬아서 어렵게 사는 거니까. 물론 역체감을 무시하는 일은 쉽지 않다. 매우 노력해야 가능하다. 나는 맛에서는 거의 성공해냈다. 대신 ’음질과 감성의 해상도, 말하고 쓰는 뽄새’ 가 아직도 타협이 안 되는 부분이다. 그래도 FLAC랑 320k를 구분할 정도의 변태는 아니다. 음역대가 안 묻히고 들리는지, 그리고 그게 채널별로 구분이 될 정도인지만 통과되면 그다음부터는 구성, 합 등등 내용을 뜯어보는 단계로 넘어가버리기 때문이다. EQ를 플랫으로 맞춰놓은 상태에서 기기 자체의 밸런스가 심하게 거슬리는 정도만 아니면 된다. 물론 닥터드레랑 BOSE는 그냥 취향이 안 맞는다. 저 정도의 해상도가 감지되는 사람이라는 것에서 미루어볼 수 있듯이, 저 형은 역시나 카메라 덕후이다. 그 비싼 라이카 카메라랑 렌즈를 거의 15년째 쓰고 있다. 그것도 모델별로 다 써보면서. 전시회도 하고. 쉽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