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save the phenomena_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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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와 고대 천문학의 문제’ 단락의 그림 두 개, 그리고 ‘현상을 구하기에 대한 비판’ 단락의 2-3번째 움직이는 그림 두 개. 그 정도만 이해하고, 텍스트도 그 두 단락 정도만 대강 보면 된다. 그 아래는 과학사, 과학철학, 논리철학적 사조에 대한 구조적인 흐름 이야기인데, 몰라도 그만이다. 어차피 볼맛 없는 건 내가 먼저 다 읽어치우고 나서 이 글의 후반부에 압축해놨다.
‘피투성’과 비슷하게 언제 어떻게 머리에 들어왔는지 모르고, 정확한 의미도 잘 모르면서 계속 맴도는 용어가 있었다.
‘현상구제,
To save the phenomena’.
‘구제’라는 번역 때문에 각종 구제사업처럼 물질적이거나 행정적인 지원, 또는 자선사업 등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넓은 의미에선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철학이나 과학에서 ‘현상’을 ‘구제’하는 방식은,
‘설명됨으로써 현상 혹은 존재가 의미를 가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의 대척점에는 진리 추구(혹은 입증)가 있다. 참과 거짓을 판명하는 것.
이 각각의 방식은 현상을 대하는 과학이나 철학의 태도를 의미하며, 각각은 꽤나 거친 한계를 극명하게 가지고 있다. 현상 구제는 당장의 현상에 대한 ‘설명’을 제공할 수는 있으나, 태생적으로, 혹은 그런 과정의 연속과 관성 자체가 혁신적인 진리 추구에 대해 소극적, 방어적, 보수적으로 만든다.
반면 무조건 좋아 보이기만 하는 진리 추구에도 한계가 있다. 입증 결과 거짓으로 판명되었거나,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거나, 입증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예 아무것도 의미를 갖지 못한다. ‘언젠가의’ 진리는 얻을지 모르나, 발딛고 있는 현재를 설명하거나 위로하기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