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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길_04

Neon Fossel 2021. 9. 22. 14:06

정해인과의 수사 콤비는 그 상병이라면, 생활반(방)에서 정해인을 챙겨주는 일병 선임이 있다. 호텔 델루나에서 산체스로 나와서, 모두가 대충 ‘산체스’라고 부르는 사람. 유도 국대였지만 만화작가로 진로를 틀고 만화를 그리던 슈퍼오덕이다. 그리고 착하고 순하다. 어차피 일병이면 같은 짬찌인 이병을 대놓고 괴롭힐 수도 없지만, 뭘 시키거나 쪽을 주지도 않고 정해인에게 항상 친절하게 마음을 써준다. 그러다 보니 정작 그 일병은 자신보다 선임들로부터 엄청 털린다. 애들을 안 패고 안 잡는다는 이유로 자기가 털리는 것. 그리고 주로 이 캐릭터가 당하는 여러 악습(거의 고문에 가까운)이 시청자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는, 강렬한 그것들이다.

그나마 병영문화가 선진화 되었다는 우리 부대나 예하 부대에도 가다 한 번씩 있는 일이었다. 그것과 정확히 똑같진 않지만, 정도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심한 수준으로. 빈도는 계절에 한 번씩 터져 나오는 정도. 그런 놈들은 싹 다 영창 갔다가 다른 부대로 팔려갔다. 정확히 내가 생활하던 본부 생활반이나 부대에서는 없을 일이었다. 반 군대, 반 회사 같은 곳이라 애초에 밤샘근무, 야근, 자는 시간도 다 달라서 서로 얼굴 볼 시간도 없으니. 가끔 손버릇이 좀 지저분한 몇몇 놈들한텐 몇 번 신나게 줘 터진 적은 있지만 대충 맷집으로 버티고 넘어갔다. 더러운 건 피하고, 내 밑으로 전해지지만 않게 하면 된다. 물론 전역할 때 곱게 집에 보내주지 않았다. 걔네가 대충 가라로 처리했던 근무 중 보안 관련 문제를 한두 개 걸고넘어지면, 굳이 나 혹은 내 후임들이 리스크를 부담하지 않고도 내일 집에 가는 줄 알았던 놈들을 2주쯤 영창에서 콩밥 먹다 가게 만들 수 있었다. 대신 전방 파견 갔을 때는 저런 풍경이 심심찮게 있었다.

무튼 그렇게 착했던 산체스가, 정해인의 기합과 마찬가지로 갑자기 어떤 에피부터 앞뒤 설명도 없이 돌변한다. 정해인 밑으로도 후임 이병들이 몇 명 들어왔는데, 걔네가 정해인 이름조차 잘 모르는 걸 발견하자 자다 말고 집합시켜서 정해인이 보는 앞에서 잔인하게 조인트를 까는 거다. 평소엔 손을 대기는커녕 후임이 배고플까 봐 초코파이까지 숨겨놨다가 챙겨주던 선임이. 나중에 한참 지나서야 산체스가 왜 그렇게 돌변했는지, 어떤 걸 당해왔는지 부연하는 씬들이 나온다. 그 장면에서 여러 악습(고문) 장면들이 나오고. 근데 그 씬들은 일단 타이밍도 너무 늦고, 굳이 시간상 구성의 순서를 뒤바꿀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그랬구나’는 되지만 ‘그래서 왜’에 답할 수는 없는 장면들이었다. 어차피 그런 걸 쭉 당해왔다는 외부환경은 항상 그대로였다. 다만 그걸 본인은 당하더라도 아래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살던 사람이, 갑자기 ‘회심’을 했을 때는 내부에서 변수가 생긴 것이다. 그것에 대한 설명이 없으니 ‘얘가 왜 저렇게 갑자기 미쳐 날뛰나’ 하면서 벙 찌는 상황이 하나에서 두 개의 에피 동안 지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