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틀어진 속
최근 단 몇 주 사이에 입맛이 좀 바뀌었다.
매운걸 예전보다 살짝 더 매워한다. 땀 뻘뻘 흘리는 지점이 좀 앞당겨졌다고 해야 하나.
그러면서도 얼큰한 걸 찾는다. 기존에 느끼하던 것 중에 피자는 그나마 치즈가 덜 들어간 것에 핫소스를 잔뜩 뿌려서라도 시켜먹는데, 치킨은 그냥 그 튀김의 기름기가 머릿속에 딱 떠오르자마자 전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고기도 그냥 담백한 소금구이 정도가 좋다.
그래도 명절 전까지는 그닥 가리는 것 없이 이것저것 먹고 다녔다.
엄마가 잡채를 하는 동안 나와 아빠가 나머지 튀김 같은 명절 음식을 대충 한두 시간에 걸쳐서 했다. 그리고는 그다음 끼니부터 명절 음식을 전혀 입에도 대지 못했다. 확 물려서 손도 안 가게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모든 음식에 거의 비슷하게 들어가는 간 고기+야채 소가 너무 퍽퍽하고 답답하게 막혀오는 느낌. 거기에 미끄덩하게 묻어나는 것만 같은 식용유의 냄새. 얼마 안 되는 명절 음식을 돕는 척이라도 하는 거야 매년 했던 거라서, 굳이 튀김을 해서 질렸다기에도 말이 안 된다. 왜 이러지.
최근 몇년 동안은 ‘자꾸 손이 간다고 계속 집어먹다가, 어차피 매년 익숙한 그 맛을 느끼게 될 거면서 괜히 소화불량이나 불러일으키지 말고 적당히 일부러 깨작거리자’라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그런데 이번처럼 아예 손도 대지 못하게 된 건 살면서 처음이다.
어차피 손님 자체를 줄여버린지 거의 10년이 넘어가니, 끽해야 우리집과 큰집 + 옆집 사람들 서넛 정도가 다였다. 그래도 가끔 갑툭튀 하는 먼 친척들이 있을까 봐 예의상 한판씩만 하는 거라, 예전보다 명절 준비는 정말 할 게 없다. 그래서 우리 집은 대충 구색만 갖춰놓고 평소에 하던 대로 일을 한다.
나도 올라온 김에 고구마도 캐고, 고추도 좀 따면서 거들고. 그래서 한 끼 굶고 일을 빡세게 해서 배고파지면 좀 낫겠거니 했다. 아니었다. 땀에 젖은 옷을 두 번이나 갈아입을 정도로 배도 고프고 녹초가 되었는데도 그 비슷한 느낌이 나는 아무 음식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밥에 김이나 얹어서 억지로 밀어 넣고 말았다. 먹어야 일을 하니.
그렇게 명절 연휴 첫날, 당일을 거의 아무 것도 안 먹고 지나쳤다. 부모님이나 친척들을 걱정시킬까 봐 대충 먹는 척만 하다가 스윽 빠졌다. 이 정도로 굶었으니 배가 안 고파서도 아니고, 딱히 속이 메스껍거나 그런 것도 아니긴 하고. 입맛을 돋울 다른 음식을 먹으면 나아지려나? 그래서 음식을 떠올려봤다. 근데 아예 먹고 싶은 것 자체가 없었다. 뭐지 이거. 신기한 현상이네.
대부분 어린애들은 느끼하고 짭짤한 짜장을 좋아하고, 아저씨들은 나이 먹으면 얼큰-한게 좋다면서 짬뽕을 먹던데. 그냥 아재가 되어가니까 느끼한 게 싫어서 그러나. 그러기엔 얼큰한 거라도 딱히 찾는 음식마저 없어져버렸으니 완전히 설명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명절이 지나고는 안 느끼한 것 중에 아무거나 영양균형이 대충 맞는 걸로 깨작거리고 있다. 다행히도 먹는 걸 까먹거나 아예 안 먹게 되는 건 아닌 듯. 하루 이틀을 뭘 먹는 것도 아니고 안 먹는 것도 아닌 상태가 지나고 있었다. 그러다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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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창전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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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국물은 얼큰-하면서도 곱창 자체가 고소하고 진한데, 그렇다고 기름기가 둥둥 뜨지는 않는. 딱 저거다. 얼큰하더라도 너무 맑기만 하고 밍밍한 찌개들은 안 땡기고, 진한 맛을 내는 다른 것들은 당연히 기름기의 느끼함이 따라왔는데. 장점만 쏙쏙 뽑아서 갖춘 음식이 요기잉네. 그런데 참 신기하다. 2-3년 전까지는 있는 줄도 몰랐던 메뉴였다. 살면서 어쩌다 한두 번 소리만 들어본 이름. 그걸 좋아하다 못해 이렇게 찾게 될 줄이야.
곱창전골로 뚫리니 갑자기 모밀이 떠올랐다. 오오 새콤새콤. 맞아, 나 모밀도 좋아했지. 그러다가 고춧가루 팍팍 얼큰한 우동도 떠오른다. 오예 폭포수처럼 나오는구나 - 는 아니고 일단 얼큰한 우동에서 끝났다. 그래도 먹을게 두 개는 생겼다.
먹는 것에 아예 입도 못 대는 건 뭔가 중요한 걸 잃었을 때 그랬었는데. 의식하는 수준에선 그렇다고 생각할게 딱히 없는데. 아니겠지. 얻고 잃거나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아닌 수많은 것들이 교차하는 올해가 지나고 있다. 적어도 지금 뭔가 ‘더’ 잃은 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곱창전골, 모밀, 얼큰한 우동
일단은 이걸로 버티자. 살았다. 근데 저걸 어디 가서 먹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