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iness Bringer_01
고모할머니, 즉 아빠의 고모, 할아버지의 동생은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음식과 살림을 정말 깔끔하게 잘하는 분이다. 어지간한 젊은 사람보다 음식 메뉴의 다양성과 난이도, 그리고 완성도가 어마어마했다. 옛날 시골사람 같지 않게 늙기도 곱게 늙었고, 사람이 센스 있고 유쾌하면서도 적당히 점잖다. 억척스럽고 바지런한 흔적도 있지만, 그게 연민이나 동정을 불러일으킬 만큼 너무 고되고 누추하게 늙지 않은, 희한한 사람이었다.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 그러니까 고모할머니 자신의 오빠를 많이 닮았다. 턱선이 갸름하고 눈이 크고, 눈매와 콧날이 날카로운. 좋게 보면 인물이 훤하고, 좀 비뚤게 보면 똑똑하고 꼬장꼬장한 이미지. 그 오빠의 얼굴을 거의 똑같이 닮은 여동생이 고모할머니였다.
할아버지가 계실 때까지는 우리 집에도 명절에 종종 오셨었다. 말투는 우리 식구들중에 가장 강화 사람 같고, 그래서 가장 북한 말투와 비슷하다. 할아버지에게 ‘오빠’라고 부를 때 ‘어’도 ‘오’도 아닌 애매한 그 중간 발음의 ‘어빠’라고 하셨던 게 기억이 난다. 이산가족 상봉 영상에 나오는 북한 아줌마들이 말하는 딱 그런 말투다. 말의 높낮이도 정말 소름 돋게 그 북한 억양이다. 상대적으로 강화 내륙인 우리 시골 동네도 할매들이나 아줌마들이 거의 다 비슷한 말투를 쓰긴 하지만, 이쪽이 훨씬 걸쭉하다. 가끔 말씀하시는 걸 듣다 보면 내가 휴전선을 넘어서 잘못 왔나(?) 싶을 정도.
그리고 이상하리만큼 아빠와 다른 형제들중에 아빠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그 자식인 나한테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무려 지금으로부터 20년은 더 된 그 시점에도 매년 서너 번씩 명절 겸 찾아뵈면 그 어린 나한테 용돈을 10만 원이 넘게 푹푹 꽂아주시곤 했다. 지금으로 환산하면 대충 20-30만 원이 넘는 돈이다. 그때나 요즘이나 굳이 따지면 꽤나 먼 친척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아빠 형제 중에 아빠가 유일하게 남자니까, 그리고 내가 장손이자 친손자니까, 옛날 사람이라 그런 걸 따져서 그러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