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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iness Bringer_03

Neon Fossel 2021. 9. 24. 18:12

옛날 사람인 아빠가 무려 어렸을 때니까, 그리고 농경사회의 완전 극단에 있는 시골이었으니까, 그 당시 여자들은 살림에 매여있느라 쉽게 자리를 뜨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증조할머니는 한참 나이가 들고 살림 일선에서 물러난 다음에야 딸에게 가볼 생각이라도 해볼 수 있었다. 그래도 갈 방법이 없었다. 요즘처럼 버스나 택시가 잘 다니던 것도 아니고, 그 옛날에 시골에서 차나 오토바이 같은 다른 수단을 쓸 방법도 딱히 없었으니. 당시 아빠는 대충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농사일에 내몰린 탓에, 국민학교를 졸업할 즈음엔 그 조그만 덩치에도 무려 경운기를 풀악셀로 때려 밟으면서 정교하게 운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증조할머니는 큰집과 우리 작은 집의 수많은 손자 손녀들 중에 아빠를 항상 찾았다.

‘일렬아, 우리 화도 한 번 가자’

철없는 아빠는 지루하고 심심한 시골의 일상에서, 무려 농사일을 땡땡이 치고 시원하게 드라이브할 수 있는 좋은 핑계라 여겨서 증조할머니를 모시고 곧잘 따라나섰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험한 길이었다. 앞서 밝혔듯 지금도 험한 그 길이 무려 비포장이었다. 그리고 포장도로에서도 작은 요철이나 돌멩이 하나만 있어도 지진이 난 것처럼 덜컹거리는 경운기였다. 그나마 좌방석이라도 있고, 엔진에 붙어있어서 덜 떨린다는 운전석에서도 크게 흔들리면 입에서 억 소리가 날만큼이었는데, 아무런 쿠션도 없는 철판떼기인 뒤 짐칸은 정말 한 시간 내내 세탁기나 탈곡기에 앉아있는 것보다 더 심했을 거다. 이건 내가 타봐서 안다. 증조할머니는 그러면서도 난간을 꼭 붙잡고 단 한마디도 불평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렇게 뼈가 흔들리듯 우르릉쾅쾅 떨면서도. 힘든 데로 시집보내서 고생할 게 눈에 선했던 그 딸을 보러 가는 길이니까. 뭐가 얼마나 덜컹거리고 느리든, 한 바퀴 한 바퀴씩, 그렇게 딸네 집에 가까워지니까. 그거면 되었다.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