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핀도르가 되고 싶었던 슬리데린
쪼꼬민뜨, aka 지원이, 정지원. 나를 최근 ‘10년간’ 가장 잘 알고 지낸 친구다. ‘10년간’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만큼 최근에 한정적이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그만큼 ‘최신 버전의’ 나를 생생하게 알고있다는 양가적인 의미이기도 하다. 언젠가, 이 쪼꼬민뜨, 혹은 지원이를 포함해서 나머지 모든 재무적인 인간들 aka 같은 전공 친구들을 싹 다 공연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때는 그러니까… 대학 3학년에서 4학년으로 넘어갈때쯤, 어떤 한 가게를 구워삶아서 우리를 홈밴드로 자리잡게 하고, 가게를 전세내고 공연하는 것에 대한 대가는 [공연시간에 한정한 모든 좌석의 우선권과 최소한의 free drink, 대관료를 상회하는 티켓값+@는 우리 용돈 쯤]으로 계약한 어떤 가게. J-NOVA in 신촌. 그 옆의 ‘가마마루이’ 라멘집이 정말 맛있다. 직접 하카다에 가서 먹고 온 하카다 라멘을, 하카다 보다 맛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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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반어적으로)무려 이름도 드높은 홍익경영연구학회의 재무분과에서 2008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금융실패, 시장실패에 대한 원인과 향후 과제에 대한 세미나를 진행했다. -라고 쓰고, 사실은 서로가 고등학교 시절을 증명해서 온 대학과, 그 대학에서의 성적과, 지금까지의 명성(Reputation)을 걸고 피터지게 싸운 날이었다. 애초에 배웠다면 우리보다 더 배운 MIT 애새기들은 이런 짓을 왜 한 거냐, 니가 맨하탄에서 400짜리 월세 내면서 1200짜리 월급 받으면 그짓 못할 것 같냐, 통계적으로 완전한 눈속임일 뿐이다 - 최적 포트폴리오를 안다는 놈들이 그런 식으로 스까먹기를 한다는 거냐, 그걸 달까지 우주선 쏘는 3차 방정식을 쓸 놈들이 몰라서 그랬을 것 같냐, 알고도 왜 그랬냐, 순진하다 - 애냐?, 그래서 지금 부시가 잘했다는 거냐, 그런 식으로 몰면 어떤 토론도 불가능하다, 진정 자본주의의 앞잡이인 것이냐, 그러는 너는 이제와서 마르크스주의자냐, 색깔놀이는 촌스럽다, 니가 지금 그러고 있지 않느냐, 정신차려라 여기 지금 21세기야. 근데 지금 저 의장놈이 무려 공연을 하러 간다네. 일단 술 먹으러 가봐봐. ㅇㅋ; 대충 이쯤으로 요약 가능하다. + 양측에서 제출한 약 970페이지의 참고자료가 요약해서 담긴 190페이지의 ppt슬라이드, 휘황찬란하게 그리스어 미지수가 11가지는 박혀 있는 수식 혹은 그래프와 함께. 선넘은 양과 정도를 통제하느라 죽을뻔했다. 이래서 배운 놈들을 밟는 건 훨씬 어렵다. 꿀밤을 한대씩 쥐어 박을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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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에 다른 민간인(?)들과 별개로, 따로 한 26명쯤 테이블을 붙여서 앉혔다. 즐비하군. 좆됐다. 아무튼 completely fucked up. 그리고는 그냥 신경을 끄고(?) 하던대로 하고싶은 소리를 내며 공연을 했다. 기타는 역시나 미친듯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값싼 베이스 엠프는 소리가 터지다 못해 이펙터를 먹인 것처럼 구겨지고 절그덕 절그덕 거려서 흡사 제초기 비슷한 소리가 났다. 어으 그러니까 더더더욱 너무나 좋아 죽겠어. 근데 그 컨트롤 하기가 너무너무 정말 힘들어서 머리가 다 빠질 뻔했어. 컨트롤 노브를 5밀리만 잘못 움직여도 세상이 당장 멸망할 것 같은 소리가 나 버리는 걸. 오늘따라 우리 노래 가사는 더욱더 야하고 염세적이고 정신나가게 들린다. 정말 fucked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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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공연을 본, 특히 우리의 ‘지인들’은 주로 비슷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지옥 혹은 슈퍼 심연에서 온 소리를, 정말로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다는, 그런 얼굴. 잘하고, 좋고를 떠나서 그냥 이계(another world)의 어떤 잘못된 소리를 들어버린 것 같다는, 그런 이상한 얼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걸 취미로 한다기엔 너무 슈퍼 전문적으로 하는 것 같으니까 기가 질려서 ‘정말 미친놈들인가’ 싶은 그런 얼굴. 그날도 대부분의 선배, 동기, 후배들은 그랬다. 가장 웃긴 대사와 반응은 ‘우리가 그동안 잘못했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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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지인들’ 같은 머글이 아니라 차라리 비슷하게 밴드를 하거나 애초에 음악 업계쪽 관계자들로 이루어진 관객들은 좀 반응이 다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요즘에도 이런 미국 남부 60년대 바이브를 굳이 재소환해서 하는 미친놈들이 다 있네 ㅋㅋㅋㅋㅋㅋㅋ 어으 맛깔지네 아주그냥 진국이네 ㅋㅋㅋㅋㅋㅋㅋㅋ 철판 진짜 두껍네 ㅋㅋㅋㅋㅋ 근데 이새기들은 이걸로 밥벌어 먹고 살 것도 아닌데 뭔 연주를 저렇게 슈퍼 빡세게 한대; 징그럽네’ 대충 이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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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이 지나서 그 관중 비슷한 멤버들이랑 놀러간 일이 있었다. 새벽 네시쯤, 생존자 열명(좀 많긴 하다)정도가 서로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술을 마시는데 지원이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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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공연할 때, 되게 낯설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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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뭔 개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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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랑 전혀 다른 언어를 하는데,
그게 너는 이미 ‘내추럴’인 것 같아서,
마치 10년을 알고 지낸 친구가
사실은 모국어가 다른 거였다는
그런 모국어로 랩하듯이 떠드는 걸 보는
그런 이상한 기분이었다고
그때 살짝살짝 웃는데,
그것도 되게 여유로워보여서 이상했다고
그냥 너 스스로인 것 같아서, 우린 되게 낯설었다고
손이 보이지도 않거나,
보여도 너무 빠르거나
말도 안되게 복잡한 연주랑
정신나갈만큼 큰 소리를
제일 가까이서 앰프로 몸에 때려 맞으면서 공연하는데,
그걸 타고 놀듯이 편해 보였다고
그래서 이상하고, 낯설고, 멋있었다고, 재수없었다고
그래서 좋았다고, 부러웠다고
넌 존나 그리핀도르인 척하는 슬리데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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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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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알고보니 지원이는 내가 치는 베이스를, 나를 알게되기 훨씬 전인 중학교 때부터 좋아하던 애였다. 물론 나랑은 포인트가 다르다. 나는 락밴드를 하는 주제에, 사실 출신은 밴드랑 퓨전재즈라서 퍼커시브하고 리드미컬한 터치감과 그루브, 뜯는 소리와 그릉그릉 긁는 소리를 좋아한다. 하지만 지원이가 좋아하는 건, 메탈이나 하드락에서 저음을 엔진처럼 굵고 복잡하게 돌리는 힘있는 소리였다. 어쨌든 학창시절을 소심하고 힘들게 보냈던 지원이는 그런 걸 좋아했고, 그런 걸 꼭 한번은 쳐보고 싶었단다. 근데 그걸 하필 내가 하고 있었고. 그건 내 모국어였다. 몇번이고 추궁했다. ‘너이새기 그냥 내가 한다니까 또 재뿌리고 딴지 걸려고 얘기 주작해서 일부러 그러는거지’. 아니었다. 증거가 즐비했다. ㅎ 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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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쯤 있다가 지원이네 회사는 직원들에게 악기를 하나씩 가르쳐서 굳이 직장인 밴드를 사내에서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단다. 자기는 정말 아무짓도 안했는데, 원래 대표이사 꿈이 그거였다고 인사팀을 구워삶아서 그런짓을 한단다. 그래서 자기도 악기를 고르고 사야 하는데, 냅다 베이스를 골랐단다. 난 엄청 말렸다. 손 아프고, 장비는 드럽게 무겁고, 멋대가리도 없고, 니가 뭐 하는지 대부분은 아무도 몰라. 특히 그런 가요 같은 거 하면. 그래서 요즘은 2주에 한번씩 베이스를 가르친다. 나는 주로 시큰둥하고, 지원이는 내가 시큰둥할수록 재수없어하고 괘씸해하며 어떻게든 나를 뜯어먹어서 배우려고 한다. 나는 그러면 그럴수록 안 가르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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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그리핀도르인 척하는 슬리데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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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나 그리핀도르야. 착하고 센놈들 되고 싶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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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