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아빠의 ‘거의 첫’ 라이센스

Neon Fossel 2021. 11. 3. 20:40

아빠와 나는 정말 딱 반만 닮았다. 인간관계의 방식, 목소리, 좀 발칙한 버전의 말뽄새, 몸의 두꺼운 부분이나 손 다리 등의 마감, 어떤 하드코어한 동물적인 본능 등이 자세히 보면 굉장히 비슷하다. 대신 얼굴 생김새, 키, 가장 중요한 ‘사무적 성격’, 앞의 것과 어느정도 중복되지만 공부라던가 학문이라던가 복잡한 토론이라던가 혹은 서류나 절차 등을 대하는 태도. 이런 건 아예 다르다. 겹치는 게 없다는 의미에서 다르다는 게 아니라, 사실상 완전히 반대다. 올해, 업계 사장들과의 친목회에서 순서에 따라 총무를 맡았단다. 회비 입출금 관리, 계좌 관리, 회계보고 양식 등등을 어떻게 할 것이며, 하고 있는지 물었다. 그냥 뭐 앞사람 하던대로 대강 하면 되지 뭐 - 아빠 입장이고, 엄마는 그나마 나랑 비슷하니까 좀 꼼꼼한데… 아빠한테 있는 추진력이 엄마한텐 없기 때문에 인계받은 기존 시스템에 대한 불만만 가득하고 지지부진하다. 일단 나 살기도 바쁘니까 다른 모든 문제들과 비슷하게 한 계절쯤을 그냥 방치하고 넘겼다.

그러다 며칠 전에서야 전화와서는 대뜸 코로나 때문에 6개월치 밀린 회계보고 겸 모임 겸 회의를 한단다. 뭐, 나 없다고 그동안 못 했던 것도 아니고, 더 대충 하는 다른 집에서 총무를 맡았을 때도 잘 굴러갔으니 알아서 하겠거니 했다. 아니었다. ㅎ… 회장이 쓰라고 준 계좌를 그대로 쓰는 바람에, 본인 명의가 아니니 기본적인 입출금 내역을 한 번에 확인하지도 못 하고, 입출금이 있을 때마다 공유되어 날아와 쌓인 문자메세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하나씩 봐야 한다니. 게다가 원래 회비랑 다른 이상한 금액들이 이상한 때에 입금이 됐는데, 그때마다 대충이라도 어딘가 메모를 해놨다면 굳이 송금한 당사자도 기억하기 어려운 몇달 전의 일을 되물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것도 하나도 안 되어 있고. 당연히, 양식은 없고. 여긴 친목회…라기 보다는 사실상 업계에서 일거리를 나누거나, 각 집에 큰 일이 있을 때 크게 쓸 돈을 조금이라도 싸게 막자는 의미에서 돈을 모으는 곳이라 금액이 크다. 많이 들어오고 나갈 때는 몇천에서 몇억이 수십번씩 왔다갔다 하는데, 저걸 여태까지 수십년간 저렇게 관리해왔다고. 기가 찰 노릇이다. 다른 집들은 돈들이 많아서 무감각한 건지, 우리집은 양쪽으로 바빠서 저렇게 대책이 없던 건지. 머릿속에서 했던 이런 생각들을 우다다다다 쏘아붙이려다가 한 숨 참았다. 어차피 이미 지난 상황을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서, 쓸데없이 푸념과 타령을 쏟아내느라 정작 당장 급한 조치에 늦는 것. 엄마의 단점이다. 나도 자의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그걸 닮았지만, 그래서 더욱 그게 싫었다. 그래서 나는 반복하지 않으련다. 참지 않고 쏘아댔으면 A4 2 페이지 분량이 넘게 랩을 했을 것을, 한마디만 했다.

“미리 조금 신경 썼으면 훨씬 편했겠군요 :)”

“그러게. 에휴 ㅠ”

어차피 부모들 본인들이 당사자이고 회장이고 총무이지, 내가 총무는 아니니까. 그동안 다른 집들이 총무를 맡았을때도 알게 모르게 자식들의 손을 당연히 빌렸겠지만, 어쨌든 원칙적으로는 그러니까. 확 가만히 내버려둘까 싶었다. 그래도 차마 그러기가 어려웠다. 아빠는 당연히 “이런 건 자기가 해야지”라며 나몰라라 할테고, 엄마는 속터지게 한줄씩 침침한 눈으로 문자메세지를 봐가며 옮겨 적으며, 계산해가며, 그 소심한 성격에 또 여기저기 전화해서 묻느라 스트레스로 셀프 고문을 하며… 그렇게 내가 하는 것보다 한 40배쯤 오래 걸리겠지. 꼬박 하루나 이틀을 끙끙거리고 있을 게 뻔했다. 내가 하면… 대충 20분이면 되겠군. 자기 전에 누워서 폰 확인하는 시간 한 번 정도를 빼서 쓰면, 부모의 이틀짜리 고통을 줄일 수 있다. 스스로에게도 남에게 보이기에도 효심이라는 필터는 언제나 좀 어색하고 거북하다. 그냥 효율의 절대우위 혹은 비교우위적 측면으로 봤을 때 내가 하는 게 나아서 해준다고 치자.

점심시간에 전화해서 시키는 그대로만 누르라고 가르쳐주면서 몇가지 세팅을 했다. 저쪽 강화도에 있는 폰의 삼성 백업이 여기로 넘어오도록. 살다살다 드물게 삼성 앱이 컴에 깔릴 일이 다시 생겼네. 전임자가 하던 양식은 참고만 할거니까 폰카로 대충 찍어서 보내라고 하고. 퇴근하고 와서 보니 양이 그다지 많진 않았다. 하루에 수십 만 셀, 혹은 수천 라인을 보는 우리 대부분 직딩들에게 이정도는 귀엽다. 엄마한텐 끔찍했을 거다. 양식을 봤다. 라인과 컬럼이 곧 인덱스이자 데이터 카테고리일텐데… 중복이다. 쓸모 없는 컬럼을 두어개쯤 날리고 테이블을 대각선 대칭으로 뒤집었다. 직관적이고 낫군 이게. 그리고 단순작업. 시기와 금액이 정기적인 것과 달라서 확인이 필요한 거래가 열댓개. 어차피 이들은 업계 내 협력업체 사장인 것과 동시에 어릴 때부터 아주 가-끔씩 보던 삼촌이나 큰아빠 같은 아저씨들이다. “어잇, 재윤이야?! 많이 컸네” 전화해서 오랜만이라고 아양떠는 건 딱 두줄 이내로 하고, 몇월 몇일에 그 내역의 정체는 뭐냐고 후딱후딱 물어보고 치웠다. 다음번에 친목회 분들 코로나 끝나고 여행 다시 가시면 공항에 마중나갈 때 봬요! 하고 마무리는 꼭 해주고.

깔끔하게 표 디자인을 다시 마무리 하고, 참석 인원의 2배수로 프린트해서 각각 다른 파일에 바람이나 물(음료수) 같은 게 들어가지 않도록 밀봉했다. 출근할 때 우체통에 넣어놓고 아무때나 시간 될 때, 시내로 나올 일 있으면 들러서 가져가시라고 했다. 저녁에 전화가 왔다. 고맙긴 한데, 종이 아깝게 이걸 뭘 두 부씩이나 뽑았냐고. 파일도 뭘 이렇게 빳빳하고 좋은 걸로 해놨냐고. 항상 그런 식이다.

“하나는 집에, 하나는 차에. 같이 살 때 보면 엄마랑 아빠는 그런 거 꼭 두고 다녔잖아요. 그리고 갑자기 잃어버리거나 뭐 쏟아서 못 쓰게 되면 예비용으로 쓰라고”

“내 자식이지만 너도 참 어지간하다”

“원래 요즘 직장인들은 다 이렇게 해요.

그리고 저번에 강화 갔을 때 아빠 차 뒷좌석에 보니까, 내가 예전에도 줬던 파일들이랑 서류들, 도면들 막 구겨져서 돌아다니던데

제발,

종이들 좀 그렇게 막 쳐박고 뒹굴게 냅두지 말라고 꼭 전해주시고…”

“말해봐야 뭐하니, 듣겠니 ㅋㅋ”

“그건 그래요 ㅋㅋ 저 씻고 밥먹어요. ㅂㅂ2”

아빠를 보면, 가끔 생각하거나 서로 대놓고 얘기하는 대사가 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나를 낳았을까
어떻게 저런 놈이 나한테서 나왔을까

라는, 그런 똑 닮고도 완전 정반대인 웃긴 부자관계이다.

그리고 이보다 좀 더 전에, 아빠가 아마 운전면허를 제외하고 오십이 넘는 생애 처음으로 딴 자격증이 나왔다. 학교 공부 비슷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지금까지야 기술 하나로 먹고 산 사람인지라 그 흔한 입학 혹은 자격, 어떤 점수 등을 위한 시험과 취득이라는 이벤트가 있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 요즘 규모가 큰 건설회사랑 계약을 하면 슬슬 자격유무를 증빙해야 될 일이 생겨서 그 친목회 아저씨들이 불이나케 자격증을 따고 있단다. 역시나 이때도 이 아저씨는 수험표와 준비사항이 적힌 서류를 시험 한 달 전부터 세 번은 넘게 잃어버렸을 거다. 일하거나 퇴근하고 와서 잠깐씩 본다고 여기저기 가지고 다니다가 그냥 아무데나 쳐박거나 집어던져 놓으니 제자리에 있을 턱이 있나. 그 시험이 끝나고, 자격증이 나왔다. 수령 주소를 내가 이쪽 집으로 해놨다. 계약서에 쓰거나 남에게 전송하기 쉽게 이런저런 포맷으로 스캔하고 전환해서 부모 각자의 폰에 보내줬다. 그러고 전화를 했더니 웬일인지 되게 궁금해하는 눈치다. 자격증 실물은 책자가 어떤 재질이냐, 사진 잘 보이게 나왔냐 등등. 처음 받아보는 상장 혹은 자격증 비슷한 게 좋은가 보다. 이런 건 원래 아빠 입장에서 아들에게 느껴야 할 뿌듯함이나 귀여움 아닌가. 뭔가 반대로 됐어(…).

부모가 누구일지도 모르고 일단 머리채 잡혀서 태어나버리긴(?) 했는데, 나와 보니 당신들이라서 나름 좀 재밌게 살고 있습니다 덕분에. 아프지 말고, 고생하지 마세요. 자꾸 신경쓰이니까.

—/
#hm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