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서야 원인을 발견한 대환장 증세
발단은 이렇다. 오랜만에 허리와 다리 건강엔 그다지 좋을 일이 없는 자세가 해보고 싶었다. 의자에 앉은 채로 침대에 다리 올리기. 그 상태로 글을 써보고 싶어서 맥북을 올리려는데 문득 뭔가 부적합하다고 느껴졌다. 무겁고, 게다가 무릎 높이에 있을 키보드에 당연히 디스플레이가 붙어있으니 고개를 엄청 숙여야 한다는 점 때문에.
그리고 최소한 cpu와 램이라도 열심히 갈구는 종류의 '일'이 아니라, 그냥 순전히 텍스트만 취급할 건데. 전원을 굳이 다시 켜서 저 비싸고 연약한 소모품의 집합체인 맥북의 cpu와, 쿨링 시스템과, 스토리지 턴오버와, 디스플레이의 내구도를 조금씩이라도 깎아먹어야 하나. 한창 일하는 낮부터 저녁이라던가, 잘 준비를 하기 전까지의 밤에는 어차피 켜서 쓰던 김에 쓰니까 상관은 없는데.
아참, 아이패드가 있었지. 내 아이패드 에어2는 올해 햇수로 6년차가 되어 가는데, 정말 쌩쌩하게 잘 돌아가고, 아직도 두께와 곡선은 얄쌍하게 아찔할 정도로 예쁘다. 1-2년 전까지, 맥북을 쓰기 전에는 일할 때나 카페에서 글쓰고 놀 때 부지런히 썼었는데. 어느새 e-book과 유튜브 & 넷플릭스 머신으로 용도가 제한된 지 오래였다.
얼마 전에 방 정리를 하다가, 그때 같이 쓰던 블루투스 키보드를 발견했다. 애플 정품은 아니고, 써드파티 제품 중에 디자인이 그나마 패드와 비슷하면서도 중저가로 산 것이었다. 자주 들고 다닐 거라서 키 깊이가 매직키보드처럼 얕고 가벼운 걸로 샀었다. 먼지가 앉고, 그 위에 뭘 흘렸는지 찐득한 막이 생겼다가 다시 먼지가 앉고. 가관이었다. 하얀 키캡이 누래질 정도로 빛이 바래고, 먼지의 막은 도저히 벗겨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켜켜히 끈끈하게 쌓여 있었다. 얘도 정말 오래 됐는데. 이 키보드는 아이패드보다 1-2년쯤 더 먼저 샀다. 대충 7-8살쯤 되는 것. 갑자기 괜히 먼지를 닦아서 다시 살려내고 싶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물티슈를 뽑아서 한쪽 면만 책상을 닦는데 쓰고, 다른쪽 면은 일부러 마르게 두었다. 그리고는 안 쓴 면들만 밖으로 나오게 접어서 세정용 아세톤을 바르고 키보드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그러다 혹시나 하고 전원 키를 눌렀는데, 이게 웬걸, 무려 반응을 한다. 1-2년동안 안 썼는데 배터리가 방전되지 않은 것도 훌륭할 뿐더러, 무려 아이패드에 자동으로 다시 페어링까지 하고는 눈을 껌뻑껌뻑 뜬 것처럼 기다리고 있다. 뭐지...? 어떻게 살아났지...? 아니 이 기특한 녀석; 이게 뭐라고 이렇게 애틋한 거야.
갑자기 다급해졌다. 매몰 현장에 방치되었다가 발견된 생존자의 먼지를 털어내듯, 키캡과 사이사이의 먼지와 얼룩을 꼼꼼하게 빡빡 다 닦았다. 제발 닦여라, 제발. 미안해(?). 다행히 신기하게도 모든 먼지와 얼룩은 다 닦였다. 누래졌던 표면도 빤딱빤딱하게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글은, 정말 오랜만에 그 아이패드와 그 키보드로 쓰고 있다.
패드는 최근에도 손에서는 떨어지지 않았지만, 원래 하던 글쓰기를 맥북에게 완전히 뺏기고 반쪽짜리 기능만 하다가 그 일을 다시 하게 되니 기분이 좋을 거다. 그리고 책장 구석 of the 구석에 쳐박혀서 끈끈한 먼지와 얼룩을 뒤집어쓰고 있던 이 키보드는 다시 말끔하게 빤딱빤딱해진 채로 내 손길이 닿으니까 좋겠지, 아마(?). 그리고 요즘엔 자는 시간이라도 맥북을 꼭 꺼서 확실하게 쉬게 해주긴 하지만, 이런 애매한 순간에 다시 소환(...)내지는 재출근(...)해서 하루종일에 더해 추가근무 고생을 할뻔했던 맥북도 덩달아 조금 더 쉬거나 잘 수 있게 됐고. 유치원 이후로 물건에 이렇게 인격 비슷한 것을 부여하면서 이입한 건 베이스와 라미 만년필을 제외하고는 없었는데. 스스로의 이런 현상이 굉장히 오그라들고 낯설지만, 일단 지금 이래버려. 이렇다고 그냥.
그렇게 베어 앱으로 글을 쓰다가 뭔가 낯선 현상이 발생했다. 베어 앱을 맥에서 쓸 때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슬라이드를 하면 메모의 목록이 뜨고, 한 번 더 슬라이드 하면 한 번 더 펼쳐지면서 메뉴가 뜬다. 부채처럼 접어놓은 UI라서 예쁘다. 반대로 모션을 하면 역으로 한 번씩 접히면서 글 쓰는 영역만 깔끔하게 보이고. 패드에서는 이번에 베어 앱을 처음 쓰니까, 베어 앱에서도 기본 폰트의 종류와 크기를 설정하려고 터치로 슬라이드 해서 메뉴를 펴려는데(?) 이게 웬걸. 안 움직여. 어 뭐지? 왜지?... 일단은 화면 구석에 있는 버튼을 찾아서 아쉬운대로 메뉴를 켜고 대충 넘겼다.
그러다 조금 전에 뭔가 일이 벌어졌다. 위 아래로 스크롤링을 하려고 한 손가락을 쓰다가, 실수로 옆으로 밀었는데 메뉴가 나오는 것이었다! ㅇ ㅏ... 이제서야 이유를 알게 됐다. 나는 아이패드의 터치 디스플레이에다 대고, '맥의 트랙패드'처럼 두손가락 무빙을 하고 있던 거였다. 이 패드의 터치 디스플레이에서 두 손가락 무빙은 그저 '줌인-아웃'일텐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새 트랙패드에 적응되면서 어떤 종류의 병이 생겨버린 거였다. 터치 디스플레이에 대고 트랙패드처럼 비비고 있었다니. 이게 바로 제목의 그... '이제서야 원인을 발견한 대환장 증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목이랑 너무나 상관 없는 글이라서 잘못된 제목인 것 같은데, 그냥 내버려 두련다.
(근데 이건 아이패드와 맥의 트랙패드 쌍방과실이기도 하다. 아이패드에서도 두 손 터치는 트랙패드와 다르지만, 나머지 네 손으로 앱 접기라던가, 네 손으로 밀어올려서 전환할 앱 고르기, 네 손으로 앱 즉시 전환하기... 이런 게 되어버리잖아. 그러니까 아이패드 네가 트랙패드랑 비슷하게 모션기능이 있으니까 헛갈릴 소지를 제공한 거다. - 그래서 어쩌라고... 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생각해보니 아이패드는 아예 스마트폰처럼 한 손이 아니면, 완전히 네 손가락. 이 두 가지 밖에 없다. 근데 맥북 트랙패드는 복잡하다. 슬라이드가 두 손, 디스플레이 스택 전환은 세 손, 앱 고르기 및 디스플레이 스택 설정은 네 손.)
(그냥 다 쓰지마, 아무것도 쓰지마. 아오...)
(좋다고.)
(... 뭐야 이게. ...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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