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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에서는 예, 술을 배웁니다._04

Neon Fossel 2021. 11. 17. 21:01

와… 여기서 일하셨었나요? 아니요. 몇 년 단골이세요? 우리 몇 년 됐지? 아, 십 년이네요 딱.   그러다 저들은 언제인지 모르게 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있다가, 언제나처럼 언제나 가던 집으로 갔다. 알바였다가 점장이 된 통통이 주인장이랑 셋이서 바 테이블에서 떠들며 놀았다. 참치랑 연어 반반 사시미인데, 초밥이랑 김을 따로 주더니 그렇게 싸 먹으면 맛있단다. 오오… 초밥도 아니고 덮밥도 아닌 것이 뭔가 뭔가 스럽게 맛있네. 이 통통이와 우리는 얼굴을 익힌 지 5년 만에 서로의 나이와 직업을 깠다. 내 직업의 이력을 듣더니 특이하다는 반응이다. 음악 하실 땐 혹시 보컬 아니셨나요 - 그럴 리가요. 왜요, 목소리도 좋고 쩌렁쩌렁해서 잘하실 것 같은데 - 음역대가 좁아터져서 안 됩니다. 대신 남들한테 잔소리하는 거 했었습니다. / 와 그럼 무슨 ‘핵’ 같은 것도 만드실 수 있겠어요 - 아니요, 하자면야 할 순 있겠는데 돈은 안 되고 재미도 없어서 안 합니다. 통통이는 내가 한샘에서 일하던 바로 그 무렵에, 무려 현장 시공 하청업체 기사로 일했었단다. 내가 매장 OJT 한정으로 때로는 전화로 싸우고, 쫓아가서 사정사정했던 그들. 세상 참 좁아. 요즘 가게가 어려워서 평일엔 일찍 닫고 다음날 아침부터 투잡을 뛴단다. 오히려 껍데기집보다 대로변이긴 한데, 여긴 철저히 유동인구에 영향을 받기에 주말에만 미어터지는 행인들이 있고, 평일엔 단골이 없단다. 그럼 살이 빠질 만도 한데. 어쨌든 고생이다, 얘도.

다른 날보다 두 시간은 일찍 자리를 정리했다. 들어가서 워프레임 숙제도 해야되고, 끝나면 레이스도 봐야 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도 치러야 한다. 많이 마셔봐야 어차피 내일은 월요일이다. 신상에 좋을 일이 그닥 없다. 마신 술보다 떠든 양이 더 많아서 역으로 깨버린 게 좀 아쉽긴 하지만.

그리고 혼자 집으로 오는 길. 신촌에도 굴다리가 있다면, 홍대에도 굴다리가 있다. 신촌으로 넘어가기 직전, 예전 지원이네 자취방이 있던 언덕 앞. 차들 몇 대가 지나가려다가 앞에서부터 주춤주춤 다시 뒤로 물러선다. 차도 사람도 꽉 막혀있다. ‘설마’. 역시나 촬영이었다. 길바닥 양쪽 끝을 대충 막고, 여기저기 눈치를 보며 서둘러 찍으려는 스텝들이 이쪽과 저쪽 끝에 한 무더기씩. 예전부터 참으로 촬영이 흔한 동네다. 내가 가던 카페는 뻑하면 1층이 드라마에 세 번 중 한 번 꼴로 나오는 곳. 그린 클라우드. 그만큼 자주 가던 길 맞은편 카페 가비애는 바로 옆이 커피프린스라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관광객이 바글바글 했었다. 거기서 신촌 쪽으로 좀 더 가면 있었던 패턴 에티오피아도 어지간히 빈티지 컨셉질에 충실한 카페라서 촬영이 잦았다. 우린 당연히 귀찮았다. 다른 데 가야 되거든. 그러다 최근엔 그 자리에 웬 모나미 가게가 들어왔다. 지하철역 출구 근처의 단골집 분점에선 조개술찜에 감탄하다 보니 뒷 테이블에 스윙스가 앉아 있었다. 어쩌다 해리포터의 다이애건 앨리나 녹턴 앨리 같은 이상한 골목에 평소와 다르게 들어가서 맥주를 마시다 보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연예인들이 굉장히 웃기고 구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자주 가던 다른 고깃집의 맞은편엔 슈주 강인이 맥주집을 차려 놓고 처음 몇 달은 빨간 페라리를 끌고 잘 왔다 갔다 하더니만, 그새를 못 참고 또 뉴스에 나올만한 뻘짓을 하고는 쥐도 새도 모르게 가게가 없어졌다. 기타 수많은 중계차량을 동반한 뉴스 리포터나 페스티벌 혹은 이벤트 등등. 이젠 붐마이크와 쨍한 조명과 인파를 보면 ‘아 뭐야, 또…’가 절로 나오지.

우리의 일상은 누군가에게 촬영되고 보여질만한 그런 것인가, 그런 것이었나. 우리의 일상이 그렇게 드라마 같고, 그렇게 축제 같은 건가. 일상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가, 축제보다 더 축제 같은가. 드라마 같은 건, 축제 같은 건, 좋은 걸까. 참 별게 다 흔한 동네를 흔하게 여기며 살아왔구나. 그런 건조한 느낌. 예술은 좋다. 좋은 것 근처와 내부는 때로 추하고 구질구질하며 복잡하다. 배가 부른 소린가. 저주인가. 행복한 드라마처럼 살았으면 좋겠다. 예술은 아무 대가 없이 좋은 쪽으로만 내 삶에서 찬란했으면 좋겠다. 도둑놈 심보다.

아까부터 걷는 게 한쪽으로 쏠리고 영 불편하더니만, 자세히 보니 구두 밑창이 앞뒤로 화려하게 터져나갔다. 아니, 이게 이러도록 전혀 아무런 전조가 없었단 말인가. 오전부터 저녁까지도 멀쩡했었는데. 멀쩡했던 것에 비해 너무 처참하게 뜯겨나가듯 발살났는걸; 하나 더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이 정도로 심하게 어디 걸렸으면 넘어질 법도 한데 그럴 일 자체가 없었다. 뭐지. 밝은 색으로 빤딱빤딱한 스타일은 다시 하나 사야겠네.

귓속에서 노래가 끊기고 시리가 발신자를 읊는다.

어디야 / 가는 길
언제와 / 50분 +- 3?
올 때 메로나 / ㅋㅋ 나 근데 구두 완전 박살 났어
뭐? 어쩌다? 데리러 가? / 아니, 일단 피트인 할 수는 있음
알겠어, 조심히 빨리 와. 졸려 / 응
메로나 안 사와도 돼 / 안 사갈려고 했어
짜증나 / 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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