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F1 Season Finale - Still We Rise!
현재시각 2021년 12월 12일 20시 26분. 한국시간 기준 F1 레이스인 22시까지 한시간 반 남짓 남았다. 이번 시즌 22라운드 중 22번째 라운드. 최종전. 챔피언쉽 경쟁자인 루이스 해밀턴과 막스 베르스타펜은 시즌 전체의 승점 총점이 최종전 직전까지 소수점 0.5점까지도 다르지 않게 딱, 동점이다. 이런 경우는 1974년 이후로 처음이다. 물론 그때와 비교해서 시즌 전체의 경쟁적인 분위기는 엄청나게 더 고조되어 있고, 두 차량과 드라이버의 기량차이가 이렇게 다른 스타일이지만 호각인 적은 없다고. 그냥 '양팀과 두 드라이버의 실력이 비슷하니 총점이 같을수도 있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승점체계와 변수를 생각해보면 우연이라도 그러기가 정말 어렵다. 승점은 20명의 드라이버 중 상위 10명에게 1위부터 25, 18, 15, 12, 10, 8, 6, 4, 2, 1점. 둘중 한쪽이 번갈아서 혹은 양쪽이 기계적인 결함이나 사고로 아예 리타이어 해서 0점인 적도 있었고, 둘 다 호각으로 1-5위 내로 피니쉬했더라도 그 순서와 횟수는 완전히 예측불가하고 불규칙했다. 그 모든 경우의 수가 21번 동안 누적되어 도착한 369.5점 VS 369.5점. 참 여러모로 역사가 만들어지는 걸 여러번 보게 된 2021 시즌이다. 나의 F1 첫 시즌.
지난시즌 최종전이자 올해 초, 루이스 해밀턴은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아서 한 경기를 출장하지 못했다. 다행히 길지 않은 시일 내에 완치됐지만, 이후 폐활량 저하와 피로감 등 중장기적 후유증이 남았다. 이마저도 경쟁자인 레드불에게 드러나선 안 되는 약점이라고 생각해서 이번 시즌 중반까지 숨겼지만 결국은 인정했다. 시즌 중반이었던 여름-초가을 경기에 해밀턴은 숨을 엄청 헉헉거린다던가, 탈수증세로 시상대에서 내려오자마자 기절해버리는 일도 있었다.
FIA(F1 등 모터스포츠 협회)가 메르세데스를 저격해서 너프하는 규정이 이번 시즌에 적용되었다. 차의 디자인 중 다운포스에 큰 영향을 미치는 밑판 뒤쪽을 날렵하게 날려버리는 기술규정. 모든 차의 다운포스가 20퍼센트 날아갔고, 그 결과 차량의 매카닉한 성능보다 에어로 다이내믹에 훨씬 강점이 있던 레드불이 그나마 유리해졌다. 어차피 이런 로비는 공공연하게, 혹은 친분을 이용한 뒷구멍으로 어느 팀이든 한다. 한 팀의 독주체제가 너무 오래 지속되니 사실상 밸패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이해하면 쉽다. 그리고 어느정도 이해해줄만 하다. 작년인 2020 시즌의 메르세데스 차는 '별 일이 없는 한' 무난하게 1,2위로 두 대가 출발해서 뺑뺑 돌다 보면 경기 끝날 때는 다른 팀의 차와 거의 1km, 기록으로는 랩당 1초(80m) 가량 압도적으로 빠르게 피니쉬하는 노잼 경기들이 많았기 때문. 내년인 2022년은 F1 차의 세대가 아예 바뀌는 기술규정 변경이 또 있고, 정작 올해인 2021년부터 예산제약 규정이 걸려 있었다. 올해 차에 너무 돈(인력, 시간, 파츠)을 많이 부으면 내년부터 5년간 지속될 뉴메타 대비(개발)가 약해진다는 말. 결국 불리하게 저격당한 에어로 다이내믹 성능의 손실을 돈을 때려부어서 메울 수도 없다. 그래서 시즌 초중반까지 메르세데스 차는 코너에서 리어가 휙휙 흐르면서 엄청 불안했다.
메르세데스는 규정 저격으로 맞은 선빵에 똑같이 규정 저격으로 맞받아쳤다. '레드불 너네 리어윙 수상해?!' 그러자 레드불은 '메르세데스 너네 프론트윙 수상해?!'로 재반격했고, 양쪽이 주고받은 데미지를 고려하면 오히려 별로 소득은 없는 싸움이 되었다.
거의 8년간 너무 많이 해먹은 메르세데스와 해밀턴 대신 떠오르는 신인인 막스 베르스타펜과 레드불 팀을 응원하는 여론이 많아졌다. 그리고 상술한 문제들 때문에 시즌 초중반-중후반까지 거의 호각이거나 막스의 우세가 이어졌다. 당사자와 관계자 혹은 팬들 모두에게 막스와 레드불이 이기는 습관, 이기는 것이 당연해진다는 '모멘텀'이 생긴 것이다.
그래도 그때마다 해밀턴은 그나마 덜 불리한 서킷에서 퀄리파잉 폴 포지션, 레이스 우승 등을 꾸역꾸역 챙기며 바득바득 따라붙었다. 그 매번의 힘들었던 경기마다 그가 팀에 자주 했던 말이 있다.
'Thank you for NOT giving up on me'
날 포기하지 않아줘서 고맙다.
누가 봐도 포기할만한 시즌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번 시즌 한번을 막스와 레드불 팀에게 주고, 시즌 상금에 큰 타격이 없이 안정적인 시즌 2위만 지키면서 다음 시즌부터 쭉 이어질 앞으로의 5년을 더 잘 대비하는 쪽으로 선회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혹은 메르세데스 팀이 이미 내부적으로 그렇게 결론을 내린 게 아니냐는 추측 내지는 억측도 많았고. 이번 시즌은 이미 정치에서 지고 들어간 시즌이며 돈(인력, 시간, 파츠)으로도 해결할 방법이 아예 막힌 시즌이니까. 버린 시즌 아니냐는 그런 말. 하지만 내외부의 그런 말들에 그들은 그다지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어찌보면 그들도 무수히 흔들렸다. 하지만 그나마 덜 흔들리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항상 해밀턴이 저렇게 말하면, 팀은 그렇게 화답했다.
'Lewis, we NEVER give up on you'
시즌 중 규정 범위 내에서 3-4차례 이런저런 파츠의 업데이트가 있었다. 그러다 중후반쯤 메르세데스의 업데이트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레드불과 비슷하거나 약-간 모자른 차에서, 이젠 약-간 앞서거나 거의 비슷한 차가 되었다. 물론 차가 세졌다고 좋아하기만 할 일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2022년부터의 메타 변화에 대비할 예산을 너무 많이 끌어다 쓴 게 아니냐는 우려도 같이 따라왔으니까. 미래를 땡기거나 팔아서 현재의 다급한 승리를 거머쥐려는 게 아니냐는 우려.
그리고 이렇게 차의 퍼포먼스가 비슷해지자, 이 둘의 자존심 싸움, 즉 멘탈싸움이 시작됐다. 퍼포먼스가 다르면 레이스 초중반에 벌어진 격차가 유지되거나 더 벌어져서 부딪칠 일이 없다. 하지만 퍼포먼스가 비슷하면, 최소한 레이스 중 서너번은 시속 300km가 넘는 속도에서 차가 부딪칠수도 있을만큼 완전히 겹치는 장면이 반드시 연출된다. 막스는 다른 팀 팬들은 물론이고 본인의 팬들조차 인정하는 '과격한 드라이버, 쌈닭'이다. 오죽하면 SNS에서 F1 공식계정도 써먹는 유머 중에 '막스는 절대 비키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 해밀턴은 최근 5년간 거의 그럴 일이 없었다. 당연히 나이와 경험이 늘면서 사람이 좀 철이 들거나 여유를 가지고 길게 보는 것도 있을테고, 무엇보다 레드불을 포함한 다른 팀들과 성능 격차가 너무 많이 나서 딱히 부딪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밀턴도 막스 나이일 때, 자기보다 훨씬 경험 많고 잘하는 팀메이트를 이겨먹거나, 경쟁 팀과 성능이 아직 비슷했던 메르세데스를 타고 우승하려고 할 땐, 일명 '무지성 노랑대가리'라면서 욕을 한사발씩 들이킬만큼 자비없이 들이댔었다. '똑같은 놈들'이라는 것. 오히려 이쪽이 원조이고, 더 나쁜 놈이다.
각자가 서로가 아닌 다른(상대적으로 순한...) 드라이버들에게 들이대면 그들은 쌍욕을 하면서도 순순히 비켜줬다. 쫄리니까. 그런데 과연 똑같이 그런 놈들 둘이 부딪친다면. 역시나 예상대로 원조든 최신버전이든 둘다 매콤했다. 절대 안 비켰다. 단순히 경쟁심에 눈이 멀어서 위험한줄도 모르고 부딪치기만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얘네가 서로 피하려고 작정하면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로 예술적인 드라이빙을 보이며 피하는 걸 볼 수 있다. 경쟁에 미쳐서 자기통제를 잃은 게 아니다. 일부러 그러는 거다. 기싸움에 지면 안 되니까. 한 번 호구 잡히면 계속 당연히 비켜줄 거라고 생각하거든. 그리고 그런 기싸움의 효용과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라 더욱 그렇다. 막스 입장에선 자기의 승리라는 모멘텀을 유지하기 위해 해밀턴의 기를 초장부터 확 밟아놔야 되고, 비집고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해밀턴 입장에선 바로 그 모멘텀을 깨부수려면 부딪치는걸 각오하고서라도 순순히 비켜주면 안 된다. 그래서 한 시즌에 다른 차와는 한 번 크게 부딪치는 일도 그닥 없는 F1에서, 똑같은 차끼리 시즌 내에 무려 작게는 10회, 크게도 4회나 뒤엉키는 소위 '개싸움'이 시작됐다.
중반부터 그렇게 호각을 보이던 기싸움은, 막스의 홈 레이스를 거치며 막스쪽으로 조금 더 기우나 싶었다. 그러다 시즌 후반엔 메르세데스의 강력한 엔진 업데이트와 해밀턴의 제 2의 고향(브라질, 해밀턴 스스로 브라질 드라이버인 세나의 팬이기 때문)에서 무려 25계단을 썰며 올라오는 추월쇼가 결국 해밀턴과 메르세데스의 모멘텀을 만들었다. 그리고 3연승. 이런 과정을 거쳐서 말도 안되는 동점으로 최종전에 왔다.
최종전인 아부다비 그랑프리(야스 마리나 서킷)는 작년에 비해 코너를 살짝 줄이고 직선 구간을 늘렸다. 그래서 직빨-하면 메르세데스이기 때문에, 안 그래도 요즘 머신과 드라이버 둘 다 다시 모멘텀을 탄 메르세데스에게 서킷마저 더 유리할 거라는 전망이 있었다. 그런데 퀄리파잉에서는 막스가 해밀턴을 누르고 폴 포지션을 땄다. 아마도 레드불은 본인들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퀄리파잉(한 랩의 기록만 측정하는)과 레이스 초반 몇 바퀴에 승부를 걸려고 단기 퍼포먼스가 좋은 셋업을, 메르세데스는 레이스 중장기적으로 타이어와 엔진이 관리가 잘 되는 셋업으로 갈렸다는 평가가 있다. 퍼포먼스도, 각 차와 드라이버의 강점도, 그리고 타이어 선택도 모두 갈려있다. 포인트는 동점이다.
사실 질까봐 보지 말까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그러다 마음을 바꿔먹었다. 지더라도 봐야지. 보고 응원해야지. 해밀턴은 이미 최고의 한 해를 나와 같은 팬들에게 선사했다. 영국 그랑프리에서 9위부터 다시 1위까지, 브라질에서 20->5와 10->1. 그 침착함과 집념, 근성, 짜릿함을 기억한다. 덕분에 삶에서도 어떤 위로와 어떤 격려를 받았다. 이번 경기에서 이기든 지든, 그래서 챔피언이 되든 말든
이미 더할나위 없었다.
져도 되지만 아쉽지는 않게 모든 걸 쏟아부었으면 좋겠다.
Still I Rise,
Still We Ri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