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uld never be me_14
모든 물질과 운동은 결국 엔트로피(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필연적으로 진행된다. 그러다 엔트로피가 가장 높은 상태, 즉 우주의 시공간에 모든 물질이 뭉치지 않고 균일하게 흩뿌려진 상태가 되겠지. 혹은 그 흩어짐마저 극으로 치달으면 아예 ‘무’로 귀결되거나. 그럼 불교처럼 무 or 무위로 돌아가는 삶을 사는 게, 어차피 닥쳐올 결말이라는 그 방향에 순행하는 방법 아닌가?
젊은 나이에 돈 뻥뻥 잘 벌고 똑똑한 친구가 머리를 깎고 전혀 힙하지 않은 회색 승복을 입는 광경을 상상했다. 눈빛을 살폈다. 영화 <인셉션>에서 꿈을 깨우는 '킥'처럼, 일상을 작살낼 수도 있는 저 사고의 흐름을 끊어줘야 하는 순간인가. 놓칠수도 있는 위험신호인가 혹은 괜한 기우인가.
너 엊그제 프로포즈 했다며 / ㅇㅇ / 제수씨한테 이런 소리까지 한 건 아니지? / 안 했지 / 잘했어 ㅇㅇ ㅁㅊ… / BTS 노래 틀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갔음 / 그렇지, 그렇게 해야지. 이런 건 프로포즈 받을 사람한테 할 소리가 못 되지.
다행이군.
근데 그런 거 재미없잖아. 어차피 어떤 식으로 살아도 도달할 결말이라면, 그 사이를 굳이 텅 비워놓고 형 집행을 엄청 미리부터 기다리듯 그러고 있는 게 또 그리 고상하고 옳은 일이기만 할까. 사실 존재의 시작과 방식, 결말에 대해선 나도 되게 방황하고 허무하게 느끼기도 하는데, 적어도 과정만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오는 것과 가는 것에 대해 잘 모르는 게 짜증나긴 하지만, 어찌됐든 어차피 있는동안은 최대한 좋은 걸 많이 느끼자고. 굳이 완전한 무위와 무소유 vs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쾌락주의라는 양극단이 아니더라도. 그거 말고도 좋은 건 많으니까.
구도자, 수도사, 승려 등등 난 그들의 개인적인 선택이나 존재를 비난하고 싶진 않다. 다만 그 선택과 방법 일반에 대한 내 의견은 '굳이 우러러 보기까지 할 일인가'라는 정도. 결국 그들의 금욕과 고행은 존재적 허무와 거기에서 오는 공포를 피하기 위한 반응이거나, 혹은 '정돈된 포기'의 상태. 그래도 비슷한 허무감을 달래기 위해 본인과 주변, 그리고 사회 전반적으로 엄청난 위험과 비용을 초래하는 방식으로 미쳐도는 사람들보다야 백배 낫기에 '그나마 다행히도 정돈된 자포자기'라는 변명은 붙여줄만하다.
관조하는 사람은 당사자보다 더 넓게 보고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다. 외롭고 답답할 순 있어도 그 고민의 방식이 단순하고 쉽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에서도 실무자보다 컨설턴트가, 게임에서도 참가자(선수)보다 관중이나 중계진이, 살벌한 실전보다 훈수가 더 쉬운 것과 같은 이치다. 난 그래서 '당사자로서' 현실을, 현실의 존재들을 스치고 뒤섞이며 겪어내는 것이 더 위험하게 흔들리고 고되며, 그래서 그 삶의 당사자로서 잘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구도자의 고행이나 금욕보다 더욱 숭고하고 값어치있다고 느낀다.
예수와 무함마드, 그리고 석가모니. 인류가 그나마 덜 사짜 냄새 난다고 인정하며 따르는 스타 3대장이다. 신기하게도 수천, 수백 년 뒤에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은 세상과 분리되고, 침묵하고, 고행하며, 금욕하는 것을 무려 '직업'으로까지 삼으며 평생 '종교의례와 정신적 탐구 및 수련활동'에 천착한다. 그런데 정작 그 추종자들이 그리도 닮으려고 하는 저 원조 3인방이 그 당시에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위로했던 현장은 [사람들이 사는 곳, 지나는 거리, 모여서 떠드는 어딘가]였다. 더 열심히 닮으려는 사람들일수록 정확히 반대로 살고있다는 웃픈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