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파괴, 아프긴 아픈 풍경
요즘 그나마 메인 삼아 한다는 게임인 워프레임에서, 나름 비중있게 다뤄진 '희생'이라는 퀘스트의 결말부분이다.
수없이 실내의 답답한 미로들을 헤쳐나가던 것과는 다르게 덩그러니 펼쳐진 광장
앙상하게 뻗어난 나무
그 뒤로 무려 인공 보철에 의지한 채 부서진 달
모든 걸 알고나서 다 포기한듯
혹은 그래서 이제 결연한듯
무릎꿇은 엑스칼리버-움브라 워프레임
저 퀘스트는 사실상 유저(오퍼레이터 = 슬픈 역사로 인해 비범한 능력을 가진 잼민이)와 워프레임(오퍼레이터가 입는 '수트'인줄 알았으나, 사실은 생전에 헌신적이고 유능한 전사였으며, 그래서 산채로 생체병기 실험에 바쳐진, '독립적인 인간이었던' 존재)의 정체를 완전하게 알게되는 내용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hHPu4tdUdP8&t=542s
이 아줌마(...)라기엔 90인거 같아서 좀 미안한데, 여튼 전라도 사투리와 욕쟁이 할매같은 맛이 구수한 스트리머가 얼마전에 스토리 정주행 영상을 올렸다. 사실 내레이션의 톤과 딕션이 그닥 좋은 편은 아닌 것 같아서 그냥 자막처리하거나 다른 사람 목소리를 쓰는 게 어땠을까 한다. 정주행 영상은 굳이 이것 말고도 여러개가 있으나, 다들 2-3년 전 버전이라서 변경점 반영이 안 되었거나 영상 화질이 좀 떨어진다. 그래서 그나마 최신 버전의 그래픽이나 세부 퀘스트 변경사항이 적용되었다는 장점이 있긴 하다.
다시 그림.
여태껏 봤던 달 그림 중에 가장 아픈 그림이었다. 달이 박살났다니.
물론 달이 저것보다 더 심하게 개발살(...)난 그림도 못잖게 충격적이라서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영화 <오블리비언>에 나왔던 바로 그 달. 그런데 저 달은 거기에 무려 '보철'을 해놔서 더 아파보였다. 저 달을 저렇게 보철을 한 것도 모자라서, 부서진 달에 유저(오퍼레이터)를 잠재워놓고는 적들의 침략으로부터 보이드(아마 블랙홀 내부의 사상의 지평선쯤 되는 가상공간)에 숨겨놓는다. 다시 이어붙이고, 꽁꽁 숨겨서라도 지키고 싶었던 달. 유저. 태양계 전체와 더불어 여러 가상의 개념과 천체를 수도없이 가볼 수 있고, 떠돌면서 열심히 썰었던 유저들은 오히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달을 최소한 100일이 넘어서야 볼 수 있다(물론 플레이타임을 고인물식 지식 검색으로 당기면 30일에도 가능하다). 달은 없어진 게 아니었다. 달은 거기에, 항상 있었다.
(감성파괘주의)
만약 달이 지구에 더 가까이 다가온다면, 달과 지구 뿐 아니라 태양계 내부의 모든 위성-행성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지만, 위성이 모성에 접근하다보면 저 동그란 모습이 그대로 충돌하지 않는다. '로슈 한계'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질량에 따른 중력의 우위에 있는 것을 모성이라 칭할 때, 그 모성의 중력이 강해지는 일정 범위 이상으로 접근하면 위성, 즉 달은 바게트 빵처럼 늘어나면서 박살나고 가루가 된 채 모성의 궤도에 흩어진다. 마치 토성의 고리처럼.
조금 다른 얘기지만, 위성이든 행성이든 어느정도의 구형을 제대로 이룬 천체가 한쪽이 저렇게 박살날정도로 다른 천체와 충돌을 하면(운석, 혜성) 큰 폭발을 하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용암덩어리 상태로 섞인다. 아니면 아예 터져나가서 역시나 분해되어버리던가(그랬다가 다시 빙글빙글 돌면서 억겁의 세월을 지나 새로운 계란으로 뭉치던가). 무튼 그래서 실제로 천체가 저렇게 부분만 박살나고 보철로 이어붙일 수 있을 가능성은 없다. 물론 좀 큰 돌 - 돌산 정도의 운석이나 혜성이라면 가능한데, 걔네들이 지름 수 킬로미터만 되어도 핵을 가지고 자전을 해버리는 순간 그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저 그림은 너무나도 가슴 아프고
찬란하게 부서지는 슬픔이다
그렇게 아리지만
가짜다.
달은 이미 완전히 부서졌다.
혹은 아예 부서지지 않고, 항상 있었다.
난 원래 달에 관심이 많은 인간이었다. 사실은 달 말고도 하늘(혹은 우주공간)에 둥둥 떠있는 여러가지에. 그래서 내 초등-중학교 시절만 아는 친구들은 오죽하면 내가 문과생이 됐다는 걸 아직도 신기해할 정도니까(물론 그 뒤인 최근 얘기를 들으면 더 신기해한다).
그래도 달은 항상 제일 자주 생각했고 중요했다. '지금 관측자인 나는 지구의 어디에 서있고, 달은 어디에 있고, 모양이 저렇다면 계절과 하루 밤 중의 어디이며, 그렇기 때문에 태양은 지금 내 발 밑(지구 반대편) 어디쯤에 있다'라는 걸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재미삼아 종종 생각해보며 논다.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starwalk 앱을 켜서 AR이나 자이로 센서 결과로 내 뇌지컬의 답안을 맞춰보는 걸 추가적인 재미로 즐긴다(... 좀만 더 심했으면 약간 변태같을 뻔했다, 이미 변태인가, 늦었군 ㅎ;).
어차피 원래 그랬던 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달에 더 많이 신경을 쓴다.
오늘은 달이 옆통수부터 정면샷까지 쭉 크고 가까웠다. 대기를 가리던 구름이 다 눈이 되어서 내리고 난 이후라 그런지 더욱 깨끗하게 크고 예쁜 노란색이었다. 예쁘게 잘 보여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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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난 이미 달이 아닐 거다
박탈된 달
달(이었던 것)
그래도
그냥 오늘 달도
지난 며칠전이나 몇주 전의 달처럼
예뻐서, 다행이다
오랜만에 본 달이 마침 예뻐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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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라고
거짓말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