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eyes!@
물 위에 떠 있는 아름다운 오필리아, 입을 반쯤 벌린 채 성녀 또는 사랑하는 여인처럼 저 어딘지 모를 허공 속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는 오필리아는 에로스와 죽음 사이의 친연성을 다시금 환기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서 햄릿의 연인 오필리아는 떨어진 꽃잎에 둘러싸인 채 마치 사이렌처럼 노래하며 죽어간다. 그녀는 아름다운 죽음, 사랑의 죽음을 맞이한다. 밀레이의 그림 <오필리아>에는 셰익스피어가 언급하지 않은 꽃 한 송이가 그려져 있다. 그것은 붉은 양귀비로, 에로스와 꿈, 도취를 암시한다. 카라바조의 그림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왕> 역시 갈망과 죽음에 관한 그림이다. 반면 브뤼헐의 <게으름뱅이의 천국>은 배가 터질 것 같은 긍정성의 사회, 동일자의 지옥을 보여준다. 뚱뚱한 사람들이 포만감에 지친 듯 여기저기 누워 있다. 여기서는 선인장조차 가시가 없다. 선인장은 빵으로 되어 있다. 이 나라에서는 모든 게 먹을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긍정적이다. 이 배부른 사회는 <멜랑콜리아>의 병적인 결혼식 하객들의 사회와 닮아 있다. 흥미롭게도 저스틴은 브뤼헐의 <게으름뱅이의 천국>을 산 채로 갈비뼈를 묶어서 매달아놓은 노예의 그림(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작) 옆에 세워놓는다. 이로써 비가시적인 긍정성의 폭력이 착취하고 강탈하는 잔혹한 부정성의 폭력과 대비된다. 저스틴은 책장에 칼 프레드리크 힐이 그린 외롭게 우는 수사슴의 스케치를 펼쳐놓은 직후 서재를 떠난다. 이 스케치는 저스틴이 마음속에서 느끼고 있는 사랑을 향한 동경과 에로틱한 갈망을 다시 한 번 표현해준다. 이 장면에서도 그녀의 우울증은 사랑의 불가능성으로 나타난다. 라스 폰 트리에는 칼 프레드리크 힐이 평생 심한 정신병과 우울증으로 고생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제시되는 그림들의 순서는 영화 담론 전체를 재현한다. 에로스, 에로스적 욕망이 우울증을 제압한다. 에로스는 동일자의 지옥에서 아토피아로, 즉 완전히 다른 자의 유토피아로 이끌어간다.
표 차이는 재밌게도 허경영 차이였다. 트럼프도 대통령이 되는 세상인데, 윤석열이라고 안될 건 뭐냐. 그래, 그 수준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트럼프와 윤석열을 지지했던 사람들 중에는 공통적으로 그 둘이 ‘좋아서’가 아니라, 반대였던 미국의 리버럴과 한국의 민주당 혹은 진보가 ‘싫어서’ 마치 징벌하듯, 자기들의 세상을 반대쪽으로 던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다. 미운털이 박힌 그 리버럴과 진보에게 화살이 억울하게 쏠렸든 혹은 정말로 무능하고 별 차이 없이 썩었든, 물 들어올 때 노 젓고 받아먹는 것도 기술이다. 그런데 아무리 던져도 거기다 던지냐.
안보공백과 불필요한 수백억의 예산지출을 감수하고, 대통령은 매일 도로를 막아가며 굳이 용산 미군기지 근처로 출퇴근을 한다. 기존 청와대에 발이라도 들이면 부정탄다고 도사님이 그랬나 보다. 저렇게 학을 떼고 일단 안 들어가고 보려는 사람은 처음 본다. 그리고 모든 일은 수석과 전문가가 알아서 하라는 원툴 대답으로 아름답게 튕겨낸 뒤 마누라랑 주말마다 빵사먹고 영화 보고 놀러 다니느라 또 길을 막는다. 녹취록으로 이미 인간 밑바닥을 다 드러내면서 ‘당선이 되더라도 영부인 지위는 포기하겠다’ 던 줄리는 결국 ‘여사’ 직함을 달고 대통령을 넘어설 정도의 주목을 끌며 신나게 영부인 행세를 하고 있다. 해 먹으려면 저렇게 해 먹어야 되긴 한가 보다.
당장 작년까지만 해도 검사들이 판치는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검찰이랑 머리뜯으며 싸우던 법무부 장관 자리에 대통령의 측근이자 당선 직전까지 범죄 피의자였던 사람이 새로 올랐다. 그러더니 검찰과 법무부가 손을 맞잡고 검사가 모든 걸 다 하는 세상으로 신나게 후퇴 중이다. 내각 인선도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같은 국힘당에서도 ‘너무 검사 출신 원툴로만 앉히는 거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고, 그런 반발에 청와대-가 아니라 이제 그냥 ‘대통령실’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다-는 딱히 아니라고도 하지 않으며 ‘앞으로 좀 더 넓은 인재풀을 고려해보겠다’고 철판을 깔았다. 조금 간결한 전문용어로 ‘어쩌라고, 꼬우면 니가 대권 잡던가’ 정도가 되겠지. 이제 우리가 알게 모르게 우리 생활을 떠받치는 행정부는 그게 세부 부처 간판이 뭐가 됐든 그 머리는 다 똑같이 검사 아저씨들이다. 신기하다.
그나마 다행인건, 경기도지사 선거라도 엿을 먹였다는 데에 있다. 그 대항마로 당선된 김동연이 서강대 경제학 교수 출신에 경제부총리로 행정 실무까지 해봤다는 건 그 와중에 한 숨 돌릴만하다. 엿을 맛있게 드신 김은혜가 싫었던 건, 그가 국힘이라서가 아니다. 출세의 방식이 반복적으로 얄팍하면서도 괘씸했고, 결국은 같은 방식으로 내 생활까지 건드릴 자리에도 손을 뻗었다는 데 있다. 아나운서를 하다가 KT그룹의 CS 임원이 됐다(?). 아나운서 출신치고 낙하산의 투하 높이가 좀 높다 싶었다.
그러더니 대선기간 내내 코빼기도 안 비치던 사람이, 갑자기 대선이 끝나고 인수위원회 활동이 시작되자 대변인이랍시고 인수위원장이나 당선인보다도 혼자 더욱 전면에 많이 나왔다. 처음엔 이상했다. 원래 인수기간은 당선인이나 인수위원장이 구권력을 빠르게 밀어내고 장악하려고 매스컴에 한 프레임이라도 더 잡히려 난리 치는 기간인데. 윤석열은 어디 갔는지 코빼기도 안 비치고, 안철수는 가끔 단일화 사기당했다고 질질 짜기만 할 뿐 아무것도 안 한다. 왜지. 아, 공약이 수정돼서 욕먹을 것 같은 모든 브리핑에(그러니까 거의 모든 브리핑이 된다) 욕받이 내지는 방패로 나오는 거였다. 아나운서 출신 특유의 유려하지만 절제된 톤으로 날 선 비난과 비판에 겐지 튕겨내기(E)를 쓰는 게 저 사람의 역할이었다. 흡사 갑툭튀 해서 온갖 욕을 다 대신 뒤집어쓰더니 어느샌가 권력을 휘두르게 된 돌로레스 엄브릿지 같았다.
그래서 결국 1년 남짓의 기나긴 대선 기간동안 이름 한 번 언급되지 않았던 사람이(사실은 예전에 뉴스에서 자취를 감춘 뒤 어디서 뭐하는지도 몰랐던 사람이), 갑툭튀 해서 두 달 정도 윤석열 대신 욕받이 몸빵을 해주더니 그 대가로 경기도지사에 나온단다. 어,,, 그렇다. 이것도 쓸데없이 실질적인 실력과 내실에 얽매이지 않고 이직 혹은 간판 바꾸기를 가장 효율적으로 하는 이상적인 스킬인가 보다. 그래서 싫었다. 나를 종종 귀찮게 하거나, 알게 모르게 여러모로 생애주기에 영향을 끼칠 도정을 저런 껍데기 인간이 하는 건 좀 별로. 이번만큼은, 그 속이 텅 빈 껍데기만 바꿔치는 방식의 얍실한 인생 점프 콤보에 브레이크가 걸리시길 바랬다. 아니 브레이크가 걸려야 했다. 내 삶을 엄브릿지가 주무르는 꼴은 좀 싫어.
대선이 끝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서 ‘그나마’ 감은 눈 사이로 보이고 들렸던 것이 저런 것이었다. 사실 인간 개인의 변덕스럽고 이기적이며 몰이성적인 면을 커버하기 위해, 역시나 인간이 개발한 것이 시스템이다. 그리고 그 시스템 역시도 온전히 돌아가게 하는 것은 다시금 인간의 몫이다. 이제는 소수라고도 할 수 없지만 어떤 특정 개인과 집단이 역할행동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거나 실제로 그러고 있을 때, 그럴수록 미리 마련해둔 시스템을 이용해서 우리가 탄 배가 멀쩡한 곳으로 갈 수 있게끔 부지런히 잘 견제하고 감시해야 한다. 그런데 대다수는 나처럼 그냥 눈을 질끈 감는다. 차마 눈 뜨고 못 볼 꼴이라는 거다. 알긴 알아도 힘들다. 눈 뜨고 못 볼 꼴을 굳이 두 눈 똑바로 뜨고 직시하는 건. 차라리 바닷물 속에서 눈 뜨는 게 더 쉽겠어.
이렇게 견제해야할 반대가 무관심의 극단으로 무너져버린 건, 대선 직후 이어진 지방선거에서 드러났다. 아마 대선과 비슷한 스탠스와 투표 참여가 유지됐다면 지방선거도 반반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 지방선거는 ‘그 당’의 압승이었고, 투표율은 역대 최고를 경신하던 요즘 같지 않게 역대 최저를 찍을뻔했다. 결과의 대표성이 떨어질수록 일반상식을 구성하는 표는 덜 반영되고, 동기가 무엇이든 극단적인 추종의 영향이 크게 반영된다. 그래서 그들은 더더욱 국민이 예전처럼 정치에 무관심하길 바랄 것이고, 그러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못 볼 꼴’을 많이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뉴스를 보면서 ‘저걸 진짜 욕먹을 줄 모르고 저렇게 멍청한 짓을 하는 건가’싶은 생각이 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어떤 측면에서는 멍청하지 않다. 오히려 굉장히 계산적이며, 흡사 아트와 공학의 경지에 올라있다. 그래서 알면서 일부러 더 할 것이다. 못 볼 꼴. 마키아벨리 이전의 천 년과 괴벨스 이후의 100년 남짓까지 반복되어온 유서 깊은 스킬이다.
눈을 질끈 감는 건, 유쾌하진 않아도 쉽다. 그리고 그렇게 살다보면 언젠가는 1. 그 여파에 모른 채 휘둘리며 고달파지거나 2. 알게 되면 지금을 후회하거나 3. 다음 세대에게 차마 쪽팔려서 ‘미안하다’고는 못 하고 꼰대질이나 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는다. 나와 주변 모두가 그냥 ‘억까당하지 않는’ 수준의 삶 정도만이라도 살게 된다면 보람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게으른 나도 어느 정도 쉬고 나면, 바닷물의 소금기가 눈을 찌르듯 ‘못 볼 꼴’들이 비위를 역하게 거슬러도 언젠가는 다시 눈을 떠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