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ght, Esteem
오늘날 사랑은 긍정화되고 그 결과 성과주의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성애Sexualitat로 변질된다. 섹시함은 증식되어야 하는 자본이다. 전시가치를 지닌 신체는 상품과 다를 것이 없다. 타자는 성애화되어 흥분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이질성이 제거된 타자를 사랑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다만 소비할 뿐이다. 그러한 타자는 성적인 부분 대상들로 파편화되기에 더 이상 하나의 인격성을 지니지도 못한다. 성적 인격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왁물원, 침팬치, 트수, 개돼지. 그들은 왜 동물과 백수 취급을 받거나 스스로를 그렇게 낮춰야 하는 걸까.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저렇게 많을까. 굳이 설명을 붙여주자면 팬과 스트리머 혹은 어떤 집단 스스로가 자신과 서로를 일부러 적당히 얕잡아 낮추며 친밀을 형성하는 방식인 듯하다. 물론 대부분은 그게 아마 어떤 의미와 방식인지 별로 고민도 하지 않을 테지만. 그렇게 물 흐르듯 술술 넘어가는 게 /나이스/ 하고 /쿨한/ 거겠지. 반대로 나처럼 이런 걸 따지면 선비 혹은 꼰대라는 소리를 들을 가능성이 다분히 높다. 근데 이건 이미 어릴 때부터 이렇게 생겨먹은 걸 나더러 어떡하라고.
모르는 사람이지만 나랑 비슷한 생각에서 출발했으나 조금은 거칠고 날카로운 시청자가, 스스로가 저렇게 불리는 걸 스트리머에게 지적했다가 대판 싸움이 난 썰을 읽었다. 거기서도 스트리머는 본인이 *트수*라는 말의 본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 의미가 아니라 최근에 점점 희석되어서 그냥 시청자를 친근하게 부르는 용도와 의미였다고 자기를 변론했다고 했다. 그랬더니 지켜보던 다른 시청자들로부터 '왜그렇게 꼰꼰하냐, 누구도 저걸 그대로 백수라고 생각하고 말하거나 듣지 않는다, 본인이 진짜 백수라서 열폭하는 거냐' 등등의 역풍을 맞고 인민재판을 당했다는데.
생각의 출발은 비슷했을지 몰라도 액션은 좀 많이 아쉬운 사례였다. 나 한명을 대상으로 콕 집어서 뒤에 저런 한심하다는 맥락까지 끌어다 붙였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었으면 저렇게 드잡이를 하는 게 명분도 부족하고 이길 싸움도 아니다. 다만 전체에게 별 의도 없이 말하는 것이더라도 그런 고려와 배려가 없어서 듣기 싫었다면 조용히 언팔하고 알고리즘과 피드에서 지워버렸을 거다.
아쉬운 드잡이 사례와 별개로, 나 역시 저런식으로 스스로가 얕잡아 낮추어 부르고 불리는 게 싫다. 화자가 본뜻을 얼마나 알고 신경을 쓰든 그렇지 않든, 완전히 모국어가 다른 사람이 기계적으로 암기해서 말하는 게 아닌 이상, 본인의 의지와 별개로 서로를 호칭하는 건 의외로 많은 부분에서 무의식적인 태도의 차이를 만든다. 트수를 트위치나 보는 백수, 침팬치를 멍청하게 행동하는 팬들을 동물에 빗댄 것이라고 매번 생각해서 말하지 않을 수는 있다. 그냥 '시청자'와 동일한 의미로 말한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 말들 뒤에 주로 어떤 서술이 호응되는지 보면, 본뜻을 알고 의식적으로 쓴 게 아니더라도 그 태도와 포지션이 진하게 묻어있다. 트수들은 + 친구 없잖아, 인싸처럼 감히 일상생활 가능하고 트렌드 팔로업되고 이런 거 아니잖아, 이런 또라이 같은 것도 이해되잖아 등등의 내용들. 왁물원, 침팬치, 개돼지 등도 남(크리에이터)으로부터의 조소나 그들 스스로의 자조가 묻어있는 말이고, 그래서 주로 앞뒤 문장의 내용도 그런 것들과 호응된다. '우리 스스로는 좀 미친놈들이다. 쓰레기 같은 걸 소비하면서 깔깔거린다. 머리가 깨져서 뻘짓인 줄 알고도 벗어나질 못한다' 등등.
어쩌면, 아주 어쩌면, 나같은 선비들처럼만 살면 숨 막히니까, 허심탄회하게 서로를 얕잡아 낮추고 노는 것이,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자조 밖에 없는 여럿이 모여서 너털웃음이라도 짓는 것이 차라리 위로일 수 있다. 나도 가끔은 그냥 한숨 내쉬듯 그럴 때가 있기도 하니까. 근데 저런 정도와 잦은 빈도로 스스로가 그렇게 불리거나 부르는 건 싫다.
당장 현재 상황이 진짜로 미저리한 사람이라고 갈라치기 하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지금 백수면 뭐 어때. 가정을 꾸리기 전이라면 두어 번쯤은 겪어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자 휴가였다. 군대는 필사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경우 손해이지만, 백수는 언젠가 그 기간을 스스로 끝낼 수만 있다면 최소한 똔똔은 치는 경험이니까. 물론 매번 탈출의 난이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에 너무 여러 번 할 건 못된다. 그래서 백수여도 괜찮다는 말이다. 백수라고 해서 그 뒤에 붙는 부정적인 수식어를 굳이 뒤집어쓸 필요가 없다.
왜 스스로가 침팬치와 개돼지가 되려 하는가. 실제로 시청자를 그따위로 부르는 스트리머들은 '의외로 배려가 있고 매너가 나쁘지 않다'는 99번 잘못하고 한 번 잘한 걸 우쭈쭈 해주는 한 겹 가면 아래를 보면, 그 컨텐츠들은 부지불식간에 다분히 시청자에게 가학적이고 몰상식한 경우가 많다. 시청자들은 그저 자기의 선택을 후회하기 싫어서 '양해'할 뿐이다. 쉬면서 놀자고 보는 방송에서, 왜 난 저 돼먹지 못한 것들에게 '양해'씩이나 해주면서 감정 소모를 해야 되는 것인가. 필요도 없으며 득이 되지도 않는다. 조용히 날카롭게 쳐내면 그만이다.
신분제가 철폐되고 100년 남짓이 지났다. 아직 실질적이며 질적인 평등을 이루기엔 멀었지만, 우리는 적어도 명분상으로는 태생적으로 평등한 자유인, 시민이다. 신분제라는 다소 병크가 있는 족쇄를 풀어던지면서, 각각의 자존이나 자각은 귀족과 평민, 천민 그 스펙트럼 사이 어딘가로 귀결되었을 것이고, 지금도 100여 년째 진행 중이다. 부모의 소득 수준, 개인의 기질에 따라 난이도의 차이는 다소 있지만, 우리는 이제 주어진대로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자존과 자각을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가꿀 수 있다. 이 말은 자유의 선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책임의 부과이기도 하다. 이제 '나는 그냥 이렇게 태어나서'라는 핑계가 무작정 먹히지는 않는다는 뜻도 되니까.
신분제는 어쩔수 없는 차악이자 차선이기도 했고, 앞서 서술했듯 다소간의 병크 역시 있었다. 그런데 그중 귀족에게서 차용할만한 것이 하나쯤은 있다. 귀족은 당당하게 이름과 신분을 밝히고, 그것만으로도 본인의 위아래 양옆으로 신분이 연속성 있게 보증되며, 그 정보를 남에게 빠르고 간결하게 준다. 그 신분과 이름값에 맞는 행동으로 실질을 갖출 경우, 생득적인 권리를 누릴 자격이 주어진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엔 이미 완벽하게 드러난 자기 이름과 신분에 거꾸로 칼이 되어 돌아오는 책임 역시 져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도 내적/외적 자존에 민감했다.
만약 당신이 선택할 수 있다면, 책임을 지불하고 권리를 누릴 자존을 고를 것인가, 아니면 저자거리에서 라스트네임 없이 그저 뒹굴다가 없어지는 개돼지, 침팬치의 자존을 고를 것인가.
갑자기 오랜만에 다시 룬의 아이들 뽕이 차오른다.
란지에 로젠크란츠. 귀족과 천민 사이의 서자로 태어났으나 천민으로 살게됐고, 그럼에도 여러 면에서 유능하고 고결한 캐릭터다. 주인공이자 몰락한 귀족 가문의 유일한 적장자인 보리스가 타국에서 만나게 된 시종이었다. 란지에는 그들이 살던 아노마라드의 공화국 혁명을 준비하는 세력에 몰래 가담하고 있었다. 혁명 직전인 어느 날, 주인공 보리스와 우여곡절 끝에 헤어졌다가 재회한 란지에는 이렇게 말한다.
"보리스 미스트리에, 보리스 진네만
다음에 당신을 만나면
그땐 당신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