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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기다리다

Neon Fossel 2025. 1. 4. 23:42

 

'여행을 기다리다', 선미화(엽서 스캔)

 

핸들커버를 정말 오랜만에 끼웠습니다. 위부터 반쯤 끼웠을 때, '이게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빡빡했습니다. 열네 번 쯤 '이건 뭔가 단단히 잘못 되었다' 라며 포기하려던 순간을 참고, 개인의 존엄과 스스로에 대한 체면을 생각하며(...) 어찌저찌 해냈지요. 자유로에서 통일로로 이어지는 길은 언제나 그렇듯 드넓었고 적당한 수의 차들이 별일없이 쭉쭉 눈앞의 도로를 지우며 달려나갑니다. 이 구간을 종종 지날때면 '나를 제외한 나의 일상도, 혹은 저들의 일상도 무미건조할 정도로 별일없이 굴러갔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어떨 때는 거리감이, 어떨 때는 왠지 모를 살짝의 안도감이 들기도 하는 그런 무미건조하고도 기묘한 평온.

 

한겨울의 헤이리는 겨울 비수기의 폐장된 수영장 같은 스산함이 들기도 하면서, 또 몇주 이내로 찾아올 봄의 새 전시들을 위한 준비로 내부에선 분주한 모습이 교차합니다. 봄부터 가을까지의 헤이리가 해리포터의 다이애건 앨리라면, 겨울의 헤이리는 녹턴 앨리와 차라리 비슷합니다. 그냥 거닐기 보다는 '확실한 볼일'이 있는 사람들이 어딘가 앞에 차를 대고 스윽 들어갔다가 훌쩍 사라지는. 진짜들의 볼일만이 남은 거리. 내 볼일은 팔찌와 넥워머, 어떤 형태로든 그림을 얻으러 가는 것.

 

사실 또래들 중 적지 않은 일부는 차, 시계, 옷 브랜드, 기타 장비질 등에서 와우로 치면 로그경쟁 하듯 각 카테고리의 테크트리를 올려가며 노는 게 재밌다더군요. 사회적 신호의 효율적인 송수신이라는 측면에선 꽤나 동의하는 바입니다. 저도 이런 성향을 설명씩이나 하고 있을 자리가 아닌 경우를 대비해서 전투복처럼(...) 갖춰놓고 리마인더로 알람 맞춰서 주기적으로 관리만 해요. 그런데 그냥 순수하게 재미가 없더군요. 어차피 싸면 수십, 비싸면 수백-수천만원대 안에서 누구나 다 아는 브랜드의 누구나 대충 가늠 가능한 티어를 획득한다는 게, '고유함, 나에게 맞춤' 이라는 기준에서는 의미값이 아예 없는 행위라서. 그 기준으로는 '효율이 떨어진다' 정도가 아니라 그냥 측정불가, 혹은 굳이 표시하자면 그 값이 0인 행동입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누가 나랑 똑같은 거 쓰는 건 죽도록 싫다면서 왜 그렇게 남들 사는 걸 사는 거야. 한가지만 해라.

 

그렇다고 해서 10년 전의 '힙스터'들이나 60년대 미국의 '히피'쪽인 것도 아닙니다. 나는 그정도로 강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보기에 심지어 우스꽝스럽거나 기괴한 스타일까지 개성이랍시고 강요할만한 고집과 의도 또한 딱히 없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도 기품있고 예쁜 것을 나에게 제일 잘 맞게, 그리고 항상은 아니지만 때로는 기성품이나 공산품보다 상대적으로 고유하게 소유하거나 그런 고유한 신호를 보내고 싶을 뿐. 20대에는 일일이 설명하기에도 힘들만큼 여러 사람을 만나서 그렇기도 했고, 딱히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설명을 안하고 다녔습니다. 그랬더니 종종 온갖 오해와 재수없음이 난무했었죠. 샤이 히피 아니냐, 콧대 높은 스노비즘 아니냐 등등. 대충 30대 이쪽저쪽이 될쯤 부터는 꼬박꼬박 해명과 출처 설명을 해줍니다.

 

- 이거 몽블랑에서 140하던데?

- 아니야, 홍대 공방에서 산 20만원따리야 레드에 가까운 버건디 컬러가 쩔게 뽑혀서 안살수가 없었음.

 

- '워머도 버버리로 두르고 다니냐

- 아니야, 이건 헤이리 단골 매대에서 산 만원따리야. 빨간줄 하나가 비대칭으로 들어간게 킹받고 좋아서 샀음. 이쁘지.

 

- 너 일부러 비싼건줄 알고 물어보면 싸게 샀다고 엿먹이는 재미로 그러는 거지

- 아니 진짜 이뻐서 산거야(...)

- 그래? 흠. 통과'.

 

그런데 일단 팔찌와 넥워머는 오늘 망했습니다(ㅋ). 홍대에서도 이태리산 소가죽 원단을 펑펑 낭비해가며 취미로 장사하는 건물주인(추정) 가죽공방을 잘 물고 있었는데, 좀 소홀해진 사이 가게가 뽑혀나가도 모르고 있었더랬죠. 여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새 몇 달이나 됐다고 한시적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알던 가게나 매대가 다 없어졌습니다. 그렇다고 이 날씨에 새로 뚫고 다니자니 그건 좀 그렇고. 오늘 전시 관람이 목적은 아니라서 헛걸음 했던 장소 바로 옆에 무료전시가 하나 있길래 20분쯤 몸도 녹일겸 멍을 때리고 나왔습니다. 작은 뒤틀림 - '불안'이라는 주제였습니다. 추상화풍의 크로키처럼 그린 하얀 코끼리가 당최 불안과 무슨 관계인지 2초쯤 고민했었고, prism 이라는 제목을 가진 다수의 작품은 캔버스를 얇은 가로줄 여러 개로 블라인드처럼 여러 겹 덧대서 표현한 게 독특했습니다. 칼국수 반죽 썬 것 같기도 했고. 입천장이 델 정도로 뜨끈하고 얼큰한 묵은지 칼국수가 또 맛도리거등요. 그거랑 술 마시면 술을 마시는 동시에 실시간으로 깸(?). 웰빙푸드, 슈퍼푸드임.

 

그림이라도 건지자 싶어서 저저번에 들렀던 아트샵으로 갔습니다. 고오급 그림카드를 묶음할인하길래 싹쓸이 하려다가 적당히 절제했습니다. 거실과 컴방에 걸어둘 그림을 큰 것, 중간 크기 하나씩 찾고 있었습니다. 집이든 사무실이든 '뭐가 밖에 나와있으면 결국 지저분해진다'는 생각 때문에 뭐가 너무 없이 살았더니, 내가 내 공간이나 현세(...)에 너무 애착이 없는 건가 싶은 회의가 들었거든요. 그러다 저 그림을 비롯한 후보군 세 개를 골랐습니다. 어차피 같은 그림으로 사이즈는 다양하게 나오니까 일단 골랐는데, 돌아온 사장님의 대답은 다소 절망적이었습니다.

 

'하필 다 작품활동 중지하신 작가님들 걸 고르셔서...'.

 

눈에 무슨 탈주한 사람들 작품 필터라도 씌워진 건가.

아, 내가 탈주해서 그런가ㅎ;

 

그림을 처음부터 다시 골라보거나 다른데를 들르기엔 하루를 오롯이 부어야 될 것 같아서, 결국은 포기하고 제일 큰 저 엽서라도 소중하게 건져서 들고나오는 길이었습니다. 다른 소품들 몇 개랑 악세가 눈에 들어오길래 쳐다봤습니다. 그림은 갤러리에서 전시하는 여러 작가들 것들이지만, 나머지는 다 사장님이 만든 것 같았습니다. 하나씩 가리킬 때마다 '얘는 언제 뭘 보고, 무슨 생각이 들어서 뭘로 어떻게 만들었다' 등등의 설명이 술술 나왔습니다. 이런 곳에 들를 때는 항상 이 순간이 가장 만족스럽고 기분이 좋습니다. 내가 쓸 물건을 직접 만든 사람이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면대면으로 직접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그런 당당함과 열정, 책임감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나에게 꼭 맞는 걸 찾기도 좋고, 그리고 어떤 것보다 고유한 것이기도 하지요.

 

오늘 결국 목적은 단 한개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기분이 좋네요. 그림에서 처음 눈에 들어온 건 달을 같이 보는 커여운 두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천히 주변을 보니 2인 탈것(...) 같은 북극곰(?)으로 추정되는 녀석도 푸근하니 귀엽고, 오른쪽에 달 장면은 그 밑에 작고 소중한 배에서부터 나온 광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제목이 왜 '여행을 기다리다'인가 하고 다시 자세히 보니, 주인공들 주변에 여행가방이 있었네요. 포근하고 예쁜 그림입니다. 중간 크기로 업어왔으면 컴방에 휘영청 걸어놨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