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다. 한나 아렌트.

그러고보니 아직 달의 달(?)이 안 끝났었다. 구글은 의외로 항상 쓰고있으면서도 정작 메인페이지를 볼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모르고 있다가 간만에 업데이트겸 아예 맥을 껐다 켜고 앱을 새로 켜니 메인을 보게 됐다. 아직 달의 달이구나. 그래서 저런 그림이 떠있구나.

궁금했다. 왜들 저러는 걸까. 흔히 이런저런 방송이나 칼럼에서 주워들어본 분석은 맞는 말이지만 이미 식상했다. 그리고 제대로 현상을 이해했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어떤 설명이란 게 필요하다.
화가 나고 억울했다. 저런 이상한 인간들이 내 나이대, 2030이라는 걸 자꾸 대표하듯 알려지는 게. 실제로는 많이 쳐줘도 15~30퍼센트가 될까말까 한 저 사람들이. 일상을 육탄전처럼 살아내느라 바쁜 나머지 다수는 차라리 그닥 별생각이 없거나, 적어도 저런 미친 생각은 잘 안 하는데 말이지. 1) 그럴 에너지가 있을 정도로 한가하지 못하다. 2) 내 피같은 일상이 최소한 정상적으로 유지되려면 그런 이상한 짓은 그다지 용납될 수 없다.
걱정에서 비롯된 겁이 났다. 이러다 진짜 체제 안에서의 공존이라는 자체가 불가능해 지는 것 아닐까. 미국도, 유럽도, 그리고 여기도. 여기저기서 최소한의 상식이나 경계, 가장 기초적인 수준의 관용이라는 필수 버퍼가 아예 벗겨져 날아간듯 보였다. 2024년에 나온 Civil War 라는 영화는(캡아 : 시빌 워 말고) 그리 머지 않은 미래에 미국에서 정말 일어날것만 같은 일이라 섬뜩한 영화였다. 어쩌면 이미 조금씩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고. 아직도 기억나는 미드 워킹데드의 할배 대사가 있다. '문명이란 건 서로 생각이 다르다고 일단 죽이지 않는데서 출발하지'. 당장 눈앞의 반체제, 반국가가 문제가 아니라 사실상 반문명의 상태로 후퇴하는 기로에 서있는 건 아닐까.
그때쯤 그 '흔한 이런저런 방송이나 칼럼'에서 언뜻언뜻 자주 인용되며 스쳐갔던 '한나 아렌트'라는 이름이 뜬금없이 로딩됐다. 저서 제목들을 봤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아마 가장 널리 알려진), 인간의 조건, 전체주의의 기원 등. 세계대전과 매카시즘을 정면으로 부딪친 시기에 그 한복판을 살다 간 기자, 작가, 정치철학자 혹은 정치이론가. 지금과 다른듯 비슷하게 반복된 반세기 전의 난장판을 살아냈던 사람. 그래서였구나. 요즘 그렇게도 자주 인용되는 게, 그리고 그때마다 내 뇌리에 남았던 게, 그리고 지금 또 생각난 게.
그때쯤 서랍 한쪽에 잠자고 있던 도서관 카드가 생각났다. 몇 년에 한 번 생각날 때마다 갱신해서 발급받아 놓고는 또 그 다음 몇 년이 될 때까지 게으르게도 까먹고 사는 그 존재. 이미 리디북스도 쓰고 있고 밀리의 서재나 윌라 혹은 교보문고 앱 등등 당장 손만 뻗으면 앉은 자리에서 책에 닿을 수 있는 방법은 차고 넘쳤다. 그래도 괜히 어쩌다 한번씩 이럴 땐 도서관에 간다는 그 리추얼을 굳이 하고 싶어진다. 답을 찾으러 간다는 그런 액션. 그리고 내 거주지는 우리나라 지자체 중에서도 재정자립도와 복지수준이 1-2등을 항상 오가는 곳이다. 거의 모든 생산연령 인구가 바로 옆의 서울로 가서 돈을 벌어다가, 여기서는 잠만 자고 세금만 따박따박 내주니까. 괜히 김연아랑 장미란이 자기 이름 달린 체육시설을 이 동네에 세운 게 아니란 말이지. 도서관 네트워크도 양과 질이 모두 잘 되어 있다. 오랜만에 갈 때마다 놓치고 지나간채 널리고 널린 컨텐츠들이 아까운 곳이다. 세금을 냈으니까 써먹어야지.
집에서 미리 한나 아렌트로 검색하고, 쓸어갈 책의 서고 위치까지 저격해왔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저서 목록의 집필시기 기준, 앞이나 뒤가 그사이에 다 나가버렸다. 이 동네에서도 아렌트 디깅 경쟁이 붙어버린 것이다. 그렇다. 이 아렌트 할매는 요즘 비슷한 고민을 하던 사람들의 사상적 카리나였던 것이다(...). 그래, 원래 내 눈에 예쁘면 웬만한 사람 눈에도 다 예쁘다. 그나마도 제일 마지막 저서는 도서관 사이트에서 전자책으로 읽을 순 있다. 그래도 기왕 왔는데 건질 게 없나 찾아봤다. 그러던 중 아렌트를 소재로 한 입문 교양서적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이왕이면 원전을 연대 순으로 시작하고 싶어서 잘 거들떠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제목이 눈에 띄었다.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정치 수업 - [성난 개인들의 시대에서 인간성 회복의 정치로], 이인미, 위즈덤하우스'. 뒷부분이 특히. 지금 내가 궁금한 그 지점이었다. 성난 개인들이 왜 성이 났으며, 그들이 좀비보단 인간에 가까운 상태로 다시 회복될 수 있을 것인가.
어차피 몇 년에 한번 쿨이 돌 때마다 도서관에서 책을 5~7권씩 빌려가도, 대출기간 내에 한두 권도 다 못 읽고 연장에 연장을 거듭하다 결국 반납이나 간신히 하는 엔딩이 반복됐었다. 그래서 이번엔 일단 이거라도 제대로 읽자는 생각으로 한 권만 들고 대출을 찍으려 둘러봤다. 왜 도서순 누나가 테이블에 앉아서 책 찍어주는 그런데가 없는 거지. 안내 표지판을 따라가보니 무려 셀프 키오스크였다. 어르신들에게 키오스크가 공포인 걸 간접적으로 1초쯤 체험해봤다. 도대체 내가 얼마나 안 왔던 거지. 그러고보니 대출증도 갱신 안한지 오래된 거라 재발급 어쩌구 하면서 1층 로비에 물어보러 갔더니 '아 요즘은 모바일로 하시면 됩니다'. 아, ㅖ... 마치 20년 전 과거에서 현재로 워프한 구닥다리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다. 로비에 선채로 모바일 회원가입이랑 바코드 생성을 마치고 다시 올라가서 키오스크에 대출을 찍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신기하지.
집에 와서 역시나 하루이틀쯤 묵혔다가 프롤로그를 폈다. 저자는 아렌트로 논문까지 쓰고, 그 이후로도 30년 동안 파고 있는 지독한 사람이었다. 책의 구성 역시 저자가 지목한 다섯 가지 문제의식을 각각 아렌트의 저서로 꽉 채워서 안내한다고 되어 있다. 심각하게 잘 골랐다. 언젠가부터 헛바람이 들어서 입문 교양서는 너무 EZ하다는 오만함이 있었는데, 역시나 약은 약사에게. 프롤로그 끝에는 이 책이 펼칠 여정을 붙박이별(Polaris), 닻별(Casiopea), 길잡이별(북두칠성)으로 비유한다. 어?... 어릴 때부터 내 거의 모든 온라인 계정 ID는 Polaris와 Casiopea가 어떤 식으로든 짝을 이뤄서 도배되어 있었는데. 별게 다 신기하게도 우연이네.
프롤로그를 읽으면서 제목으로 시선이 다시 수렴했다. 이번엔 처음에 별로 신경을 덜 썼던, 제목의 앞부분이다.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 이상한 사람들을 분석할 때, 그들은 주로 '외로운 사람들'이라고 표현된다. 고립된 채 열패감과 열등감, 박탈감에 찌들어 탓할 대상을 외부에서 찾고, 확신을 줄 무언가 강해보이는 대상을 향해 내용이나 신념과 무관하게 병적으로 열광하고 갈망하는. 그래서 내가 받아들인 '외로움'이라는 뜻의 1차적 의미는 '그들'이다.
그리고 그 다음 2차적 의미는 바로 다른 의미에서 '외로운' 나 자신이다. 나는 종종 그 외로움을 느낀다고 스스로와 일기 같은 글들에 토로해왔다. 옆에 누가,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분주하게 있더라도 그것과 별개인 고독. 때로는 해상도의 차이 때문에, 혹은 지향점의 차이 때문에, 그도 아니면 그들은 없다고 느끼지만 나는 종종 너무도 크게 느끼는 맥락적 괴리감 때문에. 나눌 수 없는 혼란과 고민이라고 생각해서 결국 입을 다물고야 말게 되는 그런 순간들. 나를 세상 걱정 없이 지 잘난 맛에 산다고 생각하는 주변인들은 아마 내가 이렇게 말하면 '말 같은 소리를 하라'며 핀잔을 주겠으나. 아무리 복작거려도 난 종종 이런 게 외로워서 질식할 것 같단 말이지. 아주 가끔 이런 외로움이 전혀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싱크가 제대로 맞는 집단을 마주할때가 있는데, 그땐 도파민이 너무 터진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이 내 일상은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얼마 전 그 도파민 폭발의 현장도 글로 쓰려고 쟁여두긴 했다.
아마도 그래서 이 책, 혹은 이 책으로 시작한게 다행인 아렌트 디깅 여정은 '외로운 그들'과 '외로운 나'라는 두 개체가 길을 찾는 과정이 되는 것 같다. 대상이 두 개라서 그나마 다행이다. 삼체문제면 답이 없잖아(?). 삼체 드라마 쿨 돌아서 또 보고 있다(?). 재밌다. 아렌트 할매 입문에 루틴이 잡히면 삼체 소설도 중간에 읽어볼 생각이다. 언젠가 프랜 레보비츠 할매의 엄청난 시니컬함과 위트가 큰 위로와 에너지가 됐던 때가 기억난다. 가만보면 이 늙지 않는 할매들은 참 큰 일들을 한다.
그리고 아마 다음 여정은 미셸 푸코가 될 것 같다. 이것도 대학에서 철학이랑 성에 대한 교양 수업들을 들을 때, 주로 사회적 권력과 개인, 억압과 차별, 근대성의 문제에서 도발적이지만 견고한 엣지가 서있는 사람이었다. 푸코 수업을 듣던 날 수업 끝나고 교수를 쫓아가서 거의 취조에 가까운 질문을 하고, 저서 독후감 과제를 전공만큼 빡세게 채워서 냈다. 그랬더니 교수들이 ‘너는 경영대 같은데 가서 뭐하는 거니?’라며 청국장을 퍼먹는 외국인 보듯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요즘들어 또다시 아렌트처럼 푸코도 자꾸 귀와 머리에 여러번 걸리기 시작했다. 이유가 있을 거다. 너무 머지 않은 시기에 푸코도 제대로 다시 읽고 싶다.
새 안경 나왔다. 원래도 다른 물건들에서 블랙 엔 골드 조합을 좋아하긴 하는데, 안경테로 반 금테는 처음이라 좀 부담스럽다. 근데 그냥 이뻐서. 나와 남들 모두를 적응시키는 숙제가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