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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게 됨

Neon Fossel 2025. 4. 5. 00:37

약간은 너드끼가 있어서 차라리 신뢰가 가는 형이 결과를 읽기 시작했다. 법적으로는 볼것도 없이 만장일치 빼박이라는 얘기는 이미 들은지 세 달이 넘어간다. 그래도 불안했다. 요즘 하도 말이 안 되는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는 꼴을 보고 있자니. 항상 최악을 상정하고 대비하는 성격상, 이미 이 나라에 대한 내 기대치는 지하 500미터 보다도 더 뚫고 내려간 상태니까.
 
중간에 '팔다리 다 묶인채 사사건건 빠꾸먹으니 삐졌을만은 하다, 반대편 너네도 계속 어깃장만 놓지 말고 좀 어르고 달래가면서 하지 그랬어'라는 대목이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밥 한번 먹자고 들이대도 2년을 내리 쌩까는데 뭘 더 어쩌라는 거야. 관련된 사안의 절차적, 내용적인 '모두고려'를 하는 기관의 특성상 충분히 언급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럼에도 '어, 이거봐라?'라는 경계심이 잠깐 올라왔다.
 
주요 쟁점 다섯 가지는 결국 조목조목 팩트를 퍼맞으며 한참 전부터 상식이 이미 가리키던 방향으로 판단이 내려졌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하더니, 마격이 쳐졌다. 내가 적지는 않은 나이지만 그렇다고 아직 그렇게 많은 나이도 아닌데, 살면서 이런 꼴을 두 번이나 볼줄이야.
 
여러가지 감정이 동시에 스멀스멀 올라왔다. 일단 국가재난급 민폐 하나를 이제라도 치웠으니 그나마 다행이고 속시원하다. 하지만 저 자리를 두 번이나 갈아엎었다는데서 눈이 질끈 감겨진다. 그 개인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은 없으나, 저 자리가 이런 반복되는 실수로 전세계급 구경거리가 된다는 게 참담하다. 다행이지만 애초에 없었어야 할 일이다. 승리이지만 애초에 없었어야 할 전쟁이다. 저걸 저 자리에 앉힌건 어쩔수 없이 '우리'라고 묶이는 국민들 자신이다.
 
한편으로는 이 당연한 게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이며, 이 당연한 걸 굳이 이렇게 좋아해야되는 게 맞나 싶기도 했다. 언젠가 스크랩해둔 알베르 까뮈 - <페스트>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당연한 것에 대한 과도한 칭찬은 오히려 그 당연한 게 얼마나 결여되어 있었는지를 방증하는 거라고.
 
이유를 알수없게 기간이 늘어지다보니 양쪽에서 많은 사람들이 최종 평의 기관을 들었다놨다 했다. 중간에 나온 몇몇 케이스가 자기들 원하는 대로 판결이 나면, 여태 하던대로 떠받들 곳으로 취급하고. 그게 아니다 싶으면, 정치적으로 오염돼서 지지부진하게 나라를 좀먹는 집단으로 순식간에 대우가 곤두박질치고. 어쩌면 그들은 결과는 같더라도 1,2 라는 반대표를 끝까지 설득하느라 늦어진 것 같기도 하다. 만약 표가 나뉜 상태로 그냥 '결과만 같으면 됐지'하고 선언해버렸으면, 그 이후엔 나라 전체가 2:1, 3:1로 쪼개져서 끝도 없는 싸움을 했어야 하니까. 그들이 그 안에서 그 싸움을 대리하는데 걸렸을 시간이라 생각하련다.
 
그래서 최종 평의 기관에 대한 감정도 양가적이다. 만약 누구라도 그 1,2의 입장에 서서 이미 6개월도 아닌 1년이 넘게 방치된 채 엉망이 된 나라꼴을 더 연장시킨 작자가 있다면, 국가재난급 민폐 개인과 같은 취급을 받아도 무방하다. 반면 그 기간동안 안팎으로 욕먹어가며 내전과도 같을 싸움을 미니어처로 대리하고, 끝까지 설득해서 결국은 만장일치를 만든 누군가들에겐 숭고하다,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여러가지 감정이 들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전반적으로 '좋음, 시원함'으로 일단은 넘어가련다. 예전처럼 이 황당한 사건의 마지막 씬을 박제하러 결정문을 다운받으려던 참이었다. 전 직장에서 정치인을 변호하다가 직장을 옮긴 변호사 친구가 단톡방에 결정문 전문 파일을 올려줬다. 역시, 편하군. 저번에는 97페이지쯤에 달하는 결정문을 다 프린트해서 두어번 읽어보고는 창고방에 넣어놨다. 그땐 처음이라 너무 신기해서. 이번엔 너무도 지난하고 짜증났어서, 그래서 좀 찜찜하지만 고소해서 박제하련다. 근데 저런 놈한테 종이랑 잉크 쓰기에도 아깝단 말이지. 이번 꺼는 pdf로라도 그냥 소장해야지. 원본은 무려 한글 파일이다. 뭔 한글 파일이여. 하여튼 이 고리타분한 사람들.
 
일전에 '계몽됐다'라는 광신도급 간증을 보여준 변호사의 결정 당시 표정, 한줌단으로 퍼지데이를 열어보겠다는 또다른 국가재난급 민폐 캐릭터의 헛소리, 갑자기 약빨고 나타나서 조회수를 달달하게 빨았던 역사 강사의 데꿀멍 모먼트 등등. 여러가지 고로시 컨텐츠를 돌려 보면서 지인들이랑 낄낄거리고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나 조롱의 민족이다. 이 톡식한 종특은 어디 가질 않는단 말이야.
 
뒤엔 더 많은 일이 남아있다. 원인제공자 무리가 단 몇시간, 단 하루씩이라도 일단 각이 보이면 냅다 드러누웠고, 심지어 그걸 방목해버리는 참사도 있었다. 그 덕분에 증거는 실시간으로 몇천 페이지씩 계속 지워져가고 있다. 위력과 외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지를 가지고 협조한 누군가들을 끝까지 추적해서 발라내야 한다. 오히려 국민들은 '아무리 그래도 같은 국민인데'라는 말을 되뇌이며 어떻게든 공존해보려고 노력하는데, 그 위에서 엘리트라고 군림하면서도 같은 시스템에 살기를 거부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 사람들. 이지경까지 오니, 차라리 별다른 감정은 없다. 그들이 원하고 선택했듯, 이 시스템에서 배제되도록 해주면 될 일이다.
 
나라 밖에선 모든 사람들이 컨텐츠, IT, 중공업, 식문화, 심지어 K-민주주의(...) 등등을 거론하며, 분에 넘치게 추앙받는 나라. 나라 안에선 조금이라도 머리에 뭐가 들었다 싶은 순간부터 못 도망쳐서 안달난 나라. 있는 집부터 앞다투어 자기 자식은 무조건 외국으로 내보내는 나라.
 
그래도 아직은 이리저리 고쳐서 써보면 저 간극을 조금씩 줄여갈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썼던 아빠와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학교에서 고무동력기 만들기 대회를 하다가, 뜻대로 잘 안되니까 짜증나서 오히려 내 손으로 거의 반쯤 부숴버렸던 그 비행기. 마감시간이 가까워지자 스탠드에서 어슬렁어슬렁 아빠가 걸어왔다. 그러고는 단 하나의 추가 재료도 쓰지 않고, 내가 부숴놓은 그 상태 그대로에서 시작해서 뚝딱뚝딱 고쳐냈다. 그러더니 압도적인 1등까지 어거지로 시켜줬다. '꼬라지 났다고 다 부숴버리면, 뭐가 되냐 임마?, 찬찬히 고쳐쓰면 다 된다'. 우리집 구형 모델은 항상 이런식이다.
 
포기하지 말고, 찬찬히 고쳐쓰면 다 된다.
 
여기도, 이것도 그럴까. 그랬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