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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월이 가고

Neon Fossel 2025. 4. 13. 12:12

며칠 전 어떤 불온한(? 반어적) 매체의 에디터가 말했다. "얼마 전까지 2024년 16월이었고, 이제서야 새해 1월인 것 같아요". 당시엔 그냥 속으로 키득거리고 넘어갔지만 가다 한 번씩 생각나는 말이다.

 

고개를 들면 까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양쪽에 분홍 꽃이 은하수처럼 지나간다. 분홍 꽃의 은하수를 따라 길 양 옆으로 늘어선 가게들의 노르스름한 조명이 내려오고, 그 가운데로는 아무나, 혹은 누구나 북적북적 지나다닌다. 호시절이었다. 반팔이나 긴팔 위에 오픈 셔츠나 가디건 정도만 걸치는 날씨를 제일 좋아한다. 근데 요즘은 아직 중간이 없다. 뭐라도 걸치면 더울 정도로 따뜻하다가, 반대로 확실한 외투가 없으면 감기 걸려서 앓아눕기 딱 좋은 극단만을 오가는 날씨. 이렇게 좋아하는 날씨가 되기만을 기다리다 보면, 그건 단 며칠 만에 지나가버리고 당장 푹푹 찌는 여름이 오겠지. 이미 사정권으로부터 일주일쯤 벗어났어도 아직 조심해야 한다. 이때쯤 걸리는 감기에 유일하게 취약하다. 병원에서 주사랑 약을 처방받아도 거의 2주 동안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고열과 몸살, 두통에 시달린다. 꽃가루 알러지 비슷한 것도 없는데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최근 2-3년은 무사히 넘어가주는 것 같으니 올해도 제발.

 

날이 좋을 때는 그나마도 시간을 쪼개서 밖으로 나다녔고, 그게 아니면 기약 없는 야근과 대기에 묶여서 날밤을 깠다. 그나마 좀 천천히 제대로 된 여유를 부려볼 시간이 나자마자 날씨는 우중충해지더니 주말 내내 비 아니면 바람 밖에 없다. 언젠가는 공원에서 한량처럼 책을 읽다가 졸아볼 거다. 꼭.

 

작년 한 해 동안 머리가 많이 날아갔었다. 사실 주변인들은 그닥 몰랐다곤 하는데, 내 입장에선 자던 자리에 수북, 머리 감을 때마다 우수수. 드라이 하면서 보면 속이 좀 휑해 보이기도 하고. 원래도 아빠 쪽은 조부모 모두 위로 4대까지 극단적 빽빽, 엄마 쪽은 예외 없이 훌러덩 이었다. 여기도 중간이 없네. 키나 여러 가지 특징들을 외가 쪽에서 많이 받아오더니 설마 이것도 벌써 시작인가 싶었다. 그래도 굳이 병원이나 약까지 쓸 일인가 싶어서 몇 달 동안 미뤘었다. 그때쯤 마침 눈이 이상해졌다 싶었다. 원래 일이나 겜할때 빼고 일상생활을 하거나 심지어 책을 볼 때도 굳이 안경은 안 써도 됐었다. 근데 머리가 날아가기 시작한 그쯤부터 안경을 안 쓰면 일상생활이 살짝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두 가지가 겹치니 스스로 경고등이 들어왔다. 이 두 가지를 합치면 '확실하게 세월을 때려 맞는, 노화의 변곡점이다'. 남성적 매력에 더해서 기본적인 기능까지 박탈되는 시작점. 일단은 있는 안경을 꼬박꼬박 쓰고 날아간 머리를 되찾으러 병원을 갔다. 이때쯤이 국가재난급 민폐 끌어내리기가 첫트에 실패했을 시점이다.

 

병원에선 요즘 아무리 이른 때부터 머리가 날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두피 상태나 연령대 등을 고려했을때 유전적으로 날아가는 건 아니라고 했다. 혹시나 스트레스... 라는 질문이 나오길래 속으로는 '요새 스트레스 안 받고 밥벌이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대충 "예, 뭐, 좀" 정도로 치웠다. 가기 전에 병원이랑 약국을 알아보려 이런저런 블로그 글들을 좀 긁어봤는데, 의외로 여자들이 자기 남친들 뚜껑을 사수하기 위해 직접 손 붙잡고 끌고 간다는 글이 많았다. 남자가 숨겨서 여자가 몰랐어도 모자를 판에, 선제적으로 직접 끌고 간다고...? 역시나 요즘 녀성들은 진취적이구만. 그리고 그 블로그들에서 말한 대로 이 시장은 엄청나게 산업화되어 있다. 저런 문진이 끝나자마자 1) 앞이에요 뒤에요 2) 외산 진퉁, 국산 복제 3) 비싼 거, 중간, 싼 거 4) 1층 가서 약 타 가지고 가세요 ㅅㄱ. 완벽하게 알고리즘화 되어서 단 3분도 걸리지 않는 처방. 감기도 이거보단 심각하게 취급해주겠다 싶었다. 이래서 대기가 30번이 넘어가는 사람들도 곧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던 거구나. 심지어 나 같은 초행이 이렇게 민폐인거지, 먹던 사람이 처방 리필하러 오는 건 정말 20초 딸깍이었다. 아마 양쪽의 인사를 생략하자고 간소화하면 5초도 가능할 것 같았다. "별일 없지요? 딸깍".

 

약국에 갔다. 문을 반쯤 열면서 '와 되게 크고 마트 계산대처럼 시스템화 되어있다. 처방 접수는 어느 쪽이지'라는 생각이 다 끝나지도 않았을 시점이었다. 8번 레인에 있던 말끔한 약사가 일퀘 치우는 듯한 표정으로 나한테 주시를 박더니 말했다. "처방전이리주세요,6개월치,헌혈하지마시고,여자친구나와이프분있으시면깨진알약상태에서만안만지시면되고,다른건하던대로하시고,동봉해드린안내쪽지한번만읽어보시고,카드는여기에꽂으시고,안녕히가세요홓". 또 15초 컷이었다. 뭐지. 나한텐 나름 존엄성과 존재론적 위기였는데. 감기 1/10도 안 되는 것처럼 치부하는 이 일상적이고도 산업적인 광경. 너무 남용해 버려서 의미값이 흐려진 듯 하지만 '생경'했다.

 

폰트 사이즈가 3,4나 될법한 깨알같은 글씨로 된 약 설명서를 꺼내 읽었다. 주변 지인들한테 한두 번 들었었고, 사전 조사에서도 여러 번 본 그 대목을 찾아갔다. 가능한 부작용 섹션의 임상실험, 추적관찰 결과. 남자구실에 제약이 온다는 천재지변의 확률. 1) 일단 모드전환이 되냐의 문제, 2) 모드전환이 됐는데 버프 지속시간이 너무 길거나 짧을 문제, 3) 뭐가 되긴 됐는데 거기에 유효한 녀석들이 있을지의 문제로 나뉘어 있다. 확률표를 보자. 정량대로 복용하고 1년이 지났을 때 0.4퍼, 4년이 지났을 때 0.6퍼, 비정상적으로 10배가량 복용했을 때 1년에 1.6퍼, 10년에 4퍼. 다행이다. 퍼먹지 않고 먹으란 대로 먹으면 4년을 먹어도 1퍼 미만이구나. 해볼 만한 가챠다. 다행히도 그로부터 몇 달 지난 지금까지 별문제 없다. 1년에 0.4퍼를 피하는 데 성공했나 보다. 하던 대로 왕성하다(...).

 

일단 시급한 존재론적 위기와 기능론(?)적 위기를 틀어막고 나서야 눈의 문제에 다시 눈을 돌렸다. 라임 뭔데. 쓰던 안경을 그냥 잘 쓰니 안경 자체가 귀찮다는 것 말고는 그닥 불편하진 않았다. 근데 시력 검사를 너무 오래 안 한 것 아닌가 싶었다. 햇수로 10년쯤 전에 첫 취업한다고 테에만 돈백을 태운(...) 미친 안경 한 개, 4년쯤 전에 선물 받은 안경 한 개. 그 뒤로 안경 쪽으로는 내가 손대거나 남이 주거나 할 일은 없었다. 두 개를 번갈아 쓰고 있었는데, 나중에 선물 받은 안경이 조금 더 도수가 세게 맞춰져 있다. 살짝 눈이 앞으로 당겨지는 느낌이 더 들긴 하지만 그만큼 선명해서 나름의 장점이 있다. 3시간 이내로 세게 집중할 일이 있을 때 쓰는 편.

 

안경을 고르면서 쓰던 안경들을 정비해달라고 맡겼다. 돈백짜리 안경의 브랜드는 1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 브랜드 부스만 따로 있고, 심지어 쟤는 저기로 따로 가져가서 저쪽 기계로만 뭘 한다. 별게 다 스페셜하네. 그러나 지금의 난 닳고 닳은 생활인이다. 비싼 브랜드에서 디자인만 참고하고, 중가 브랜드 쪽 매대에서 거의 비슷한 디자인으로 골라서 이득 봐야지. 나보다 1.5배쯤 버는 변호사 친구 녀석도 알리에서 2만 원짜리 테 사가지고 렌즈만 안경점에서 맞춰서 갯꿀이라고 자랑하는 이상한 놈이다. 너는 꼭 출마해라.

 

얼굴이 홍대, 여의도 한복판에서도 바로 보일만큼 커서, 유연하게 늘어나지 않는 뿔테는 제약이 좀 있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아직까지 안 써본 안경도 뿔테밖에 없다. 어릴 때 뿔테는 허약하거나 너드 같은 고학생 이미지, 크고 늙어가면서 뿔테는 대박이면 김동률 / 망하면 이상민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근데 요즘 뿔테는 신기하다. 반뿔테/반금(은, 기타 색깔) 테 등등. 블랙&골드는 너무 취저인데; 오 예쁜데. 역시 예쁜 건 값을 한다. 드럽게 비싸네. 눈으로 잘 봐두고 중저가 매대로 갔다. 역시 비슷한 게 세 개쯤 있다. 여기서 위기를 직감했다. 그렇다. 역체감이었다. 한번 올라가 버린 눈이 절대 내려올 생각을 안 한 다는 것. 분명히 대충 보면 비슷한데.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잖아. 근데 뭔가 모를 코너 부분 곡선의 아쉬움이라던가, 다리랑 이어지는 부분의 살짝씩 거슬리는 짜침이라던가, 혹은 금테 부분의 정말 중국졸부 같은 그런 쨍하고 싼 티 나는 금색이라던가. 그런 게 보여버린다. 아... 망했네.

 

난 분명히 고민을 하긴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내 손에 들린 건 처음의 그녀석이었다. 구매의사결정과정, 합리적 구매를 위한 보완적 가중평가표 등등. 학교에서 돈 삼천을 부어서 배워봐야 단 한 톨도 쓸모없다(...). 근데 기분은 좋다. 술 네 번 덜 마시면 된다(덜 마시냐 그래서?). 시력 검안을 했다. 많이 나빠졌다고 하면 어떡하지. 렌즈도 압축렌즈 이런 거 써야 되는 시력이면 출혈이 큰데.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력은 10년 전 맞췄던 그 안경이랑 똑같다고 했다. '...녜...?' 대충 이런 소리가 입에서 나갔던 것 같은데. 안경사가 대머리의사랑 똑같은 말을 한다. "시력 자체는 안 나빠졌어도 '스트레스' 때문에 요즘은 일시적으로 그런 경우가 많아요. 특히 눈이 계속 피로한 채로 쉬지 못한다던가 하면 더 그렇구요". 또트레스. 이거 그냥 모르겠으면 다 갖다 붙이는 거 아닌가. 눈을 어떻게 쉬어요. 눈을 뜨고 있어야 돈도 벌고 겜도 하고 좋은 것도 하고 그러는데.라고 할 뻔. 그래도 급격한 노안이 진행된 건 아니라 천만다행.

 

그러고도 일주일쯤 지나서 안경을 받아왔다. 몇 회 전 올린 짤에 있는 그것. 그것 참 영롱하고 예쁘다. 그러고 그 다다음주에 받은 카드 내역서는 안 예쁘다(...). 며칠을 쓰고 들이대면서 평을 들어보니, '이젠 안경 써도 냉혈한 같지 않아서 그나마 낫다' 정도가 제일 담백한 평가였다. 나머지는 뭔가 오염된 평가라 적당히 새겨(?)들었다. 그렇게 몇 주 익숙해지던 사이, 내가 이 안경에 끌린 이유를 다시 알게 됐다. 나의 갓벽한 비서에 나온 여주가 비슷한 걸 끼고 있었다는 것. 세상에나. 고를 때도, 받고 몇 주가 지나도 의식적으론 전혀 생각 못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겨울이 가고, 대머리병원에서 약속한, 약속의 3개월이 얼마전 도래했다. 그사이 대밍아웃한 친구들한테 계속 떠들고 다녔었다. "나 3월에 머리 나온다". 그랬더니 어떤 친구는 '무슨, 차 나오는 날도 아니고 ㅋㅋㅋㅋ'라고 하기도 했고, 어떤 대밍아웃 선배 친구는 '티도 안나는 주제에 배부른 소리 말라'라고 하기도 하고. 그리고 진짜로 원상 복구됐다. 이제 수북 우수수 없어진 지도 오래됐고. 진짜로 영영 가버린 건 아니었구나. 현대 의약학은 위대하다. 5백만 머머리인들께 일시적 패션 머머리가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근데 뭐가 그렇게 스트레스였을까.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꼽기도 힘든 건가.

 

'머리 훌러덩 + 눈 침침'(일시적 증상, 가능성)으로 촉발된 존엄성의 위기. 나는 남자로서의 매력도 잃고, 젊음의 끄트머리에서도 미끄러지는 건가 하는 당혹감. 그나마 3개월짜리 해프닝으로 끝나서 다행이었다. 정말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면 아직 그 스트레스가 뭔지, 얼마나 심했는지는 잘 모르겠고, 모르니 해결도 안됐을 것 같지만. 한동안은 관리하는 것도 여유이자 사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만 안 찐다고 능사가 아니었다. 이젠 살기 위해서라도 몸이든 정신이든 관리해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