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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로 얌전해진 주말

Neon Fossel 2025. 4. 26. 15:39

일하거나 놀거나 걷거나 대중교통을 타거나 차를 운전할 때 웬만해선 귀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활자중독이랑 비슷한 건데, 뭔가 내용이 귓등으로라도 흘러가고 있지 않으면 무료해서 참기가 어렵다. 원래는 노래 디깅과 팟캐스트 훑어듣기를 번갈아 한다. 다만 요즘은 노래 디깅을 너무 몰아쳐서 세 달간 했더니 뭔 노래를 들어도 특징이 잘 안 잡히고 그냥 생활소음처럼 무감각해졌길래 잠시 노래 듣기를 쉬는 중이다.

 

금요일 밤에 다 싸돌아다니거나 와우로 다 놀고나서, 혹은 주말에 싸돌아다니기 전인 오전에 나른한 타이밍. 원래도 항상 듣던 팟캐스트를 '최대한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면서' 듣는 게 어느새 리추얼처럼 자리 잡았다. 침대에 대자로 뻗어서 눈을 감고, 머리맡에 폰으로 틀어놓고 듣다가 자다가 듣다가 자다가. 대충 내가 팔로우한 채널들의 최근 에피들을 와이파이 상태일 때마다 알아서 자동으로 다 다운받아놓고, 내가 의도적으로 자주 들르거나 그 시간대에 자주 들었던 순서대로 알아서 틀어준다.

 

BBC에선 지구가 어떻게 사는지, CBC에선 토론토가 잘 있는지, Waveform에선 요새 씬박한 기계 친구들이나 소프트웨어 트렌드 혹은 이슈는 뭐가 있는지, Your undivided attention에서는 AI 친구들이 스카이넷이 아니라 바이센테니얼맨이 될 수 있도록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Vox에선 또 어떤 IT이슈나 골때리는 사회 이슈가 있는지, Amplified podcast에서는 저저번주였던 코첼라 페스티벌이 어땠는지, 라디오 북클럽에선 사볼 만한 책이 뭐가 나왔는지, F1 podcast에서는 또 어떤 똥차(...) 마스터 드라이버들이 온몸 비틀기를 하며 멱살을 잡느라 고생을 했는지 등등.

 

영화 <포드 대 페라리>에서는 아버지의 레이스를 아들과 엄마가 라디오를 통해 듣는 장면이 나온다. 나도 에프원을 처음 입문했을 때, 퀄리파잉과 레이스는 영상 중계를 해주지만 프랙티스는 어둠의 경로가 아닌 이상 편법으로 뚫어야 돼서, 거의 2-3년은 그냥 한국어 유튜브 채널 해설을 귀로만 들었다. 들으면서도 생생했다.

 

사실 최고의 카메라는 우리 눈이고, 궁극의 글카이자 디스플레이는 우리 머리의 상상력이다.

 

주중의 일상 속에서도 항상 듣고 다녔지만, 주말의 저때만큼은 아예 작정하고 저 결계로 들어가서 자유롭게 차원이동하듯 이런저런 관심사를 훑는다. 앉거나 손으로 뭘 조작하거나 눈으로 굳이 뭘 보지도 않은 채.

 

그런데,

 

올 것이 왔다. 코 속이 매큰매큰하다가, 목소리가 갑자기 바뀌다가, 자고 일어나서 침을 삼켜보니 목 안에 과속 방지턱이 하나쯤 생겨버렸다던가.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살이 시리다. 몸살도 세게 왔나 본데. 근데 감기로 인한 열과 따뜻해진 날씨 때문에 더워서 땀이 뻘뻘 나니 계속 수건으로 닦으면서 선풍기도 켠다(?). 뭐야.

 

뭘 듣거나 볼수도 없다. 그냥 어떤 내용이라도 살짝 들어오거나 의식적으로 어떤 대상이든 타겟이 잡히면 냅다 머리가 아프다. 규칙적이고 인위적인 리듬을 듣기만 해도 머리가 울린다. 본능적으로 뭔가 불규칙하고 내추럴한 소리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런 앱 없나' 하고 찾다가 '그런' + '앱'이라는 이상한 구도에 그만두었다. 아. 머리맡 창가에 가끔 놀러 오는 까치 가족들이 와있다. 창문을 살짝 여니 멀리서 차 지나가는 소리랑 새들이 왔다 갔다 하는 소리가 난다. 살았다. 이런 게 먹히는 경험은 또 처음인데.

 

두통을 대충 진정시키고는 몸살기운이 더 심해지기 전에 찔끔찔금 반나절 밀린 설거지랑 일주일치 빨래를 대충 후다닥 끝내놨다. 방치한 채로 점점 더 아파지면 집안 꼴은 주말 사이에 아포칼립스가 될 것이다. 좀 두꺼운 실로 짠 가디건만 위에 걸치고, 차키랑 카드, 폰만 찔러 넣고 병원에 갔다. 다행히 독감은 아니라던데 주사는 겁나게 아픈 걸 놨다. 집에 와서 앓을 준비를 끝내놨다. 오프라인/온라인으로 있던 모든 일정도 싹 다 날려버렸다. '어째 요 몇 해 멀쩡히 넘어간다 했다'라면서 고소해하거나, 증상을 설명했더니 '감기까지도 참 유난스럽게 앓는다'라고 핀잔들을 들었다. 참 대단히 위안이 되는군. 그래도 다른 때 앓던 것처럼 1-2주씩 앓아누울 정도는 아닐 것 같다. 주사빨(?)도 잘 받고, 애초에 그때만큼 심하진 않으니. 오늘만 얌전하게 있으면 내일 저녁 정도는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흐드러지게 좋은 날씨에 이게 뭐 하는 거람.

 

근데 꼭 이렇게 강제로 방콕 당했을 때 침대에서 랩탑 가지고 노는게 꿀맛이다. 물론 화창한 하늘이 보일 때마다 답답함이 치밀어 오르는 건 참아야겠지만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