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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글씨 심리추적

Neon Fossel 2020. 6. 14. 14:52

 

 

 

글씨의 시작 부분이 이탤릭체처럼 살짝 왼쪽으로 기울면서, 곧은 오른쪽에 기대듯 가지런히 서있는 폰트로 쓰는 걸 좋아한다. 그런 의미에서 첫 글자 '화'는 가로본능처럼 모음이 벌어지며, 심지어 오른쪽으로 벌어지다 못해  쓰러진 듯 망한 글자다. 거슬린다.

 

'커'를 쓰는데, 왠지 '귀'처럼 보이게 쓴 것 같다.

 

'턱'의 '터'는 받침자가 있는 것 치고 너무 크게 썼고, 그 덕분에 ㄱ 받침은 아래 선을 보기 싫을 만큼 파고들었다.

 

이런 생각들을 하느라 괴'고'의 ㅗ 모음이 처절하게 늘어졌다.

 

집 뒤 전망좋은 공원의 모든 바닥을 뒤집어 까고 공사 중이다. 무려 휴일인데도. 거기서 들리는 포크레인 소리가 거슬린다. 창에서 바람이 제멋대로 들어와 머리를 헝클어놓고 볼을 때린다. 신경 쓰인다. 거실에서 의지와 상관없이 들리는 트로트 소리가 싫다. 배는 하나도 안 고픈데 굳이 볶음밥을 하겠다고 느끼하게 코를 찌르며 재료를 볶는 기름 냄새가 싫다.

 

치환하면, 의지와 상관없는 모든 외부신호가 유난히 거슬린다.

 

'굴광성'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가 안 되는 단어다. 정도는 얕더라도 나름 오랫동안 천문학이나 천체물리학에 취미가 있는데, 이 정도로 까맣게 모르는 단어가 있을 줄이야. 아니다 뉴튼 잡지에서 두어 번 눈으로 읽은 기억은 나는데, 그때도 어떤 의미인지 모른 채 그냥 방치하고 지나갔다. 빛이 굴절된 별이라는 뜻인가.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거기에 반사된 얼굴이 번쩍거리는 걸 표현한 건가. 이럴 시간에 검색을 한 번 하지. 근데 그마저도 귀찮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준비를 하지 않고 냅다 '굴'을 썼다. 역시나 폰트가 무너지며 '굴'인지, '귤'인지 모를 상태가 됐다. '귤'로 보이면 큰일인데 이거. 근데 볼 사람이 누가 있다고.

 

1연의 두 줄을 쓰고, 창을 닫고, 방 문을 닫았다. 2연은 의지적으로 내용을 곱씹으며 집중했다. 글씨가 잘 뽑힌다. 그런데 사실, 그냥 우연히 쉬운 자모음으로만 구성된 연이라 그런 것 같다.

 

3연으로 넘어왔다. '뻗'으면 '뻗'을수록의 두 '뻗'은 왜 저렇게 포지션과 상태가 많이도 다른 걸까. ㅃ의 오른쪽 마지막 획을 찌그러뜨린다는 습관만 일관적이고 나머지는 가관이다. 꼴랑 두 어절 사이에서도 일관성을 잃을 정도라면, 내 글씨가 아니다. 혹은 나는 아직 저 글자에 대해 표준화된 작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투둑투둑' ㅌ의 저 세 획을 얇고도 균일한 간격으로 쓰고 싶은데, 왠지 부담스럽다. 역시나 쓸데없이 글씨만 크게 쓰고 모양은 무너졌다.

 

'꽃'은 자주 쓰면서도 항상 긴장하는 글자다. 글자의 높이에 상당히 많은 지분을 차지하게 생긴 ㄲㅗㅊ 세 개를 무려 한 칸에 몰아 쓴다는 게, 마치 아슬아슬한 젠가 탑을 쌓듯 부담스럽다. 그리고 역시나 언제나 그랬듯 띠용(?)하는 표정처럼 글자가 솟은 채로 뻘쭘하게 망했다.

 

글씨에 대한 예민함에서 거리를 잠시 두고, 원래 3연에서 느꼈던 감상을 머리속에 그려봤다. '생각의 가지가 뻗어 나가고, 그것이 꽃으로 피었다가, 꽃가지가 휠 정도로 만개해서 자판에 닿으면, 손가락으로 더듬는다.' 머릿속에서 영상이 그려질 정도로 자세하면서도, 쓸데없이 비일상적이고 어려운 시어를 쓰는 힘은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상투적이지는 않은 구도와 시선과 어순, 비유. 그래서 정말 좋은 연이자 씬이다. 이 한 연을 읽는 것만으로도, 영화관에서 아이맥스 자리를 2만 8천 원 주고 보는 것과 최소한 비슷한 값어치는 지불할 용의가 생긴다. 아마추어리즘을 완전히 탈피하고 글로 밥을 벌어먹는다는 건, 저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건가 싶다. 리스펙트. 근데 이건 직업의 진입에 대한 너무 계급적 사고 아닌가. 사고 회로 중 자정작용이 필요한 지점인 것 같다. 마커 찍어놓고. 이번 주 내로 후처리.

 

그러다 마지막 연이자 마지막 행을 한 번 더 겸사겸사 곱씹었다. 커서가 깜빡이는 것을, 커서의 심장으로 두근거린다고 표현하다니. 마음에 든다 - 고 생각함과 동시에, 역시나 준비 없이 냅다 '활'자를 갈겨넣었다.

 

ㅎ,

 

'활'의 ㅗ 모음이 찌그러지자, ㅏ는 놀라 옆으로 비켰고, ㄹ은 억지로 마무리는 해야 하니까 쓰긴 썼는데 역시나 저 처참한 ㅗ의 상태를 보고 아래로 멀찌감치 도망갔다. 글자 하나 안에서 이렇게 다이나믹하게 사고가 나고 반응이 나올 줄이야. 흡사 작은 꽁트를 보는 기분이다.

 

이때쯤, 손글씨를 쓸 때의 이런 심리를 글로 추적해서 출력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모든 회초리와 후회를 반영하여 이 시의 손글씨를 다시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어차피 연습 버전이라도 글에는 이름과 주인이 있어야 하니, 제목과 작가를 쓰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 그마저도 작가명 윤성'택'의 '택'이 저렇게 됐다. 어차피 다시 쓸 거라고 생각하다 보니, 성의 있는 마무리가 딱히 아니었다는 건가.

 

손글씨 심리 트래킹을 이렇게 출력하기 직전에, 어떤 순간에 어떤 글자를 쓰며 뭘 느꼈는지 대강 직전의 단기 기억을 스캔해봤다. 지금 이 글의 초안을 머릿속에서 굴려본 건데, 이렇게 스스로에게 까다롭게 굴 거면 제대로 서예를 하거나 캘리그라피를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까 1연부터 2연 전까지, 외부 신호 모든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다른 때보다 많이 휘둘렸던 때를 회상한다. 그럼 내가 이전에 기백장 정도 손글씨를 썼던 환경은 정말 다 방해받지 않는 조용한 순간이었나. 대부분 그렇기는 했다. 혼자 있거나, 혼자 있는 밤이거나. 그렇다고 매번 그랬던 것도 아니고, 평소에 외부 자극을 모르진 않아도 그 정도로 신경 쓰거나 휘둘리는 편은 아닌데. 혹시 그냥 마음의 문제가 있어서 글씨가 휘둘리는 걸, 마침 핑계로 삼을 외부 자극이 많으니까 그렇게 한강에다 눈을 흘겨버린 건가. 마지막 추측은 다분히 심증이긴 하지만 유력하다.

 

다시 쓸거다. 잠깐 졸다가 일어나면. 가기 싫어서 몸을 베베 꼬던 약속이 저쪽 때문에 파토났는데, 직후에 역으로 괘씸하다. 그래서 쓸데없이 상대 여럿을 차가운 말로 할퀴었다. 오늘도 또, '화가 나면 차라리 화를 내라, 불같이'라는 말을 들었다. 염병, 화 내는 것도 느그들 스타일에 맞춰서 화 내줘야 되나. 이것들을 그냥. 아끼니까 넘어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