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쯤 거의 자지 않은, 좋은 날이었다. 먼 길을 오가며 바쁜듯 바쁘지 않은듯 한 날이었다. 좋은 일이 있다길래 굳이 가던길을 틀어서 들렀다. 좋은 일이었다. 가벼운 얘기를 하고 있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그자가 속에서 꺼내어 놓은 얘기가 한다발이었다. ‘왜 내가 진술서에 진술하듯, 자백하듯, 그러고있는거 같지’. 나는 진술을 요구하지도, 끌어내지도 않았다. 내가 당사자도 아니었다. 그저 듣고 앉아있었을 뿐이었다. 스스로가 차라리 경찰이나 검사였다면 일하기 참 편할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나는 그들 마음의 자백을 들어줄만큼 아량이 넓고, 견고한 사람인가. 그럴 자격이 되거나 그럴 상태인 사람인지 궁금하다. 스스로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나뒹구는 진심과 속사정은 항상 많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것들 각각은 무게나 깊이가 새삼 상당하다. 그냥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건, 성의는 있어도 염려는 부족한 미봉책이다.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해주는 건 어떨까. 아무 말이 아닌, 하고 싶은 말을 하게끔 만든다는 건 어떤 기제가 있는 걸까.
좋은 일에 마음이 단 한 톨도 담기지 않았다는 자백. 마음이 굳이 담겨야만 옳은 건가. 틀렸다면 왜 틀린 걸까. 거짓이라서 잘 못 된건가. 저게 거짓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거짓은 왜 나쁠까. 일과 설레임, 설레임과 권력은 항상 공존할 수는 없는 걸까. 질문만이 난무하는 머릿속이다. 좋은 일 치고는 좋지 않은 고민이 더 많은 저것은 악마와의 거래라도 되는건가.
바쁜게 소강상태로 접어들자마자 몸인지 마음인지가 원인미상으로 고장나는 바람에 얌전히 물만 먹고 살았는데, 간만에 술을 마셨다. 취하려고 마시는데 도통 취하지가 않는 요즘이다. 취기가 실시간으로 밀려나가는 느낌이다. 취하려던 목적과, 취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도 같다는 건 역설적이다. 오히려 주량이 더 늘었냐는 소리나 듣는다. 취기의 흔적만이 남은 몸이 천장 아래에 들어왔다. 그리고 정적, 혹은 랩하듯 시끌벅적한 머릿속. 들고나갔던 키보드, 다시 잡았다 놨다만 하는 베이스와 기타. 벗어놓은 옷, 시집, 에어팟, 글들. ‘Loving you is good, touching you is better’. 들리던 가사를 휘갈겨 쓴 메모. 만년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