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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진보의 역사

Neon Fossel 2020. 1. 25. 03:48

최근 몇 년 동안 그랬듯, 이번에도 명절 첫날이 거의 다 갔을때쯤 따로 차를 끌고 왔다. 드디어 10년을 투쟁하니 정착됐나보다. 굳이 용건을 묻지도 않고 그냥 따로 나중에 오는게 당연해진 건 올해가 아마 처음인 듯.

어린 시절 우리집의 명절은 평범하게 복작거리는, 그래서 평범하게 가혹한 명절이었다. 연휴 하루 전부터 강화에 와서, 우리집과 큰집을 오가며 큰엄마들과 엄마는 무한대로 음식을 찍어냈다. 그럼 명절 첫날 저녁부터 큰아빠들과 아빠의 친구들, 할아버지들의 친구들이 인사를 오면서 상을 차리고 치우는 걸 반복한다. 그러다 명절 당일이 되면, 근처 강화 내에 사는 5-7촌 이내 할배들과 아재들이 차례를 지낸다고 큰집에 다 모여서 그날 저녁까지 비빈다. 씨족사회 비슷하게 같은 집안의 친척들이 몇백년째 모여살다보니, 서로가 서로의 집을 무한 순회하며, 어차피 어느집을 가나 다 비슷한 명절밥상을 차리고 치운다. 안동처럼 엣헴- 하는 그런 격조(꼰대)높고 끈끈하게 붙어 사는 건 아닌데, 대략 강화 인구의 주된 성씨는 한 씨, 구 씨 이정도. 명절에 오갈 정도로 가까운 우리 친척들은 한 개의 면 단위 정도에 흩어져 산다.

그러다 우리집은 또 우리집 나름대로 손님을 받으러 내려온다. 큰집은 세어 볼 엄두를 못 냈고 우리집에만 온 손님을 중학교 때 세어본 적이 있는데, 180명이었다. 다행히 종가, 종친, 법도 따지는 것과는 거리가 먼 가풍이라 끔찍하게 번잡한 제례와 의복규정 같은 건 없다. 그리고 집안 전체적으로 평소 집안일이든 명절음식준비든 남자라고 예외는 없이 다 같이 한다. 그래도 그건 준비까지만이다. 서로 손님을 받기 시작하면, 남자들은 먹다가 배가 터지고 여자들은 차리고 치우느라 손이 부르트고 허리가 휜다.

굳이 친족과 명절로 제한하지 않고 생각해보는 일반적인 농촌의 풍경도 이와 다르지 않다. 힘든 농사일임에도 불구하고, 체감상 농촌 남자의 1/5은 자주 도박과 음주에 빠져 농사일은 돌보지도 않는다거나, 최소 한번씩은 그랬던 흑역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힘든 농사일을 억척스럽게, 흔들리지 않게 유지하는건 다 여자들이었다. 장담컨대 그 여자들이 그들의 방황 동안 버텨주지 않았다면, 길거리에 나앉았을 집이 기십 곳은 되었을 거다. 가끔 농촌이 나오는 예능에서도 썬캡과 토시를 쓰고 항상 변함없이 밭에 있는 건 여자들이다. 가끔이라도 마실을 가거나, 어디서 고스톱 치고 막걸리 거나하게 마시고 오는건 거의 남자들이고. 그나마 친족들이 몰려사니까, 한소리 들을까봐 그런지 우리 친족중에는 이런 사람들의 비율이 적긴 했다. 그리고 우리집은, 할아버지가 일 욕심이 너무 많은게 문제였고, 아빠는 시골에서 자랐어도 어차피 도시 사람인데다가 할아버지를 빼닮아서 석공 일이나 시골 일이나 끔찍한 일중독자이다. 그리고 그렇게 속 썩였으면 애초에 그렇게 엄마와 내가 가만있지 않았을 것.

그래, 뭔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고등학교에 갈 무렵, 아빠와 큰아빠가 안그래도 명절 차례 지내는 걸 이제 좀 쪼개야 된다는 얘기를 하고있을 때였다. 서로 식솔들이 많아지니, 이제 7,8촌 식구까지 합쳐서 명절을 지내면 너무 부대끼니까. 그 때가 기회다 싶어, 겸사겸사 할아버지를 구워삶아서 제사(차례)를 없애버렸다. 할아버지는 엄마를 살짝 어려워했고, 할머니도 농사일만 하는 사람이라 시집살이를 시킨 적은 없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손자인 나를 끔찍이도 예뻐했다. 군대를 갈만한 나이에도 일 돕다가 잠깐 새참 먹고 자면, 포도를 따다가 머리 맡에 갖다 놓아주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제사를 없애자는 말도 내 입에서 나오니까 별 무리없이 통과됐다. 제사를 간단한 추도예배로 바꾸니, 준비가 한결 편해진 건 물론이고 제사 핑계로 7촌에 8촌까지 우글대며 몰리던 사람들이 거의 1/10로 줄었다. 그러다 군에 있을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그나마도 동네 어른한테 인사 온다고 들이닥치던 아빠의 고향친구들이나 다른 할아버지들, 멀리 사는 친척들도 거의 안 온다. 기존에 같이 명절을 지내던 강화 내의 다른 친척들끼리는, 명절 전날 간소하게 각자 집의 음식만 해놓고 두세집 정도만 찾아가서 인사드리고 차나 한잔씩 마시고 오는 정도.

큰집의 큰아빠와 큰엄마, 6촌 형과 형수와 조카 둘, 부산에서 올라오는 둘째 큰아빠와 6촌 동생 둘 / 그리고 우리집은 할머니와 우리 세 식구 끝. 사실상 명절동안은 이 식구들끼리만 서로 가까운 두 집을 두어번 오가며 놀다가 명절 당일 아침에 20분 남짓 가족예배로 시골 교회에서 나눠준 순서지만 읽고 끝난다. 애초에 교회 안 다니는 가족들이 많이 모이는 명절이니, 그런 사람들도 부담 없고 상관없도록, 쉽고 컴팩트한 구성을 미리 짜준다. 명절 당일 오후에 아직도 바득바득 찾아오는 아빠의 고향 친구 둘 정도와 당일 저녁때쯤 오는 고모들이 있는데, 이 분들은 어차피 나도 당일 점심때가 조금 지나면 여자친구나 다른 친구들 약속있다고 7-10년째 째고있어서 그닥 필수는 아닌.

음식의 양으로 봐도 괄목할만한 변화다. 예전의 그 평범하게 가혹했던 명절에는 만두 800개, 두부 두 판, 부침개 다섯 쟁반 이상, 갈비, 찌개 두 종류 세 솥, 기타 밑반찬 8가지 정도. 요즘은 이렇다. 만두는 안 할 때도 있고, 해도 50-100개 하려나. 두부는 할머니 유일의 특기인데, 이제 기력이 달려서 자주 안 하신다. 부침개는 모든 종류를 합쳐서 딱 작은 쟁반 하나. 그리고 갈비와 잡채 조금.

아빠를 비롯한 시골남자들은 ‘명절에 음식 만들고 사람들 복작복작 오가는 재미’를 상실해가는 것에 섭섭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 음식 만드는 소꿉놀이와 서로 얼굴 보는 재미의 이면에는, 몸이 닳도록 고생하며 갈아넣어지는 여자의 수고가 있다. 굳이 비용-편익을 따져봐도 수지타산이 안 맞는 거래이고, 애초에 누군가 한쪽만의 희생으로 점철된 축제판이라는 건 가족에겐 없어야 할 일이다. 그래서 최근 5년 동안은 더더욱 좀 강하게 몰아붙여서 많은 걸 바꾸고 있다. 다행히 아빠는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아니고, 엄마를 굉장히 아끼기 때문에 주춤주춤 변화에 끌려오고 있다. 엄마의 변화도 있다. 예전엔 그냥 ‘이게 싫다, 힘들다’에서 ‘그 대신 무얼 하고 싶다’는 게 생겼다. 피차의 나이 앞자리가 바뀌기 전에, 명절때 여행으로 퉁치는 과감한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한 가지 다행인 사실은, 엄마가 본인 대의 불행을 아래로 재생산하는 타입은 아니라는 것. 흔히 시집살이나 고생을 많이 한 피해자였던 며느리가, 그것을 오히려 그대로 답습하는 가해자로 둔갑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 모든 고생을 꾹 참고 했는데, 너는 왜 그마저도 안 하려고 하는 것이냐’는 식. 엄마의 답은 간단했다. ‘니가 우리집의 귀한 아들내미이듯, 네 처도 어떤 집의 귀한 딸이야. 엄마가 그랬던 것보다는, 명절이든 아니든 친정집에 더 자주 편하게 오갔으면 좋겠다. 너에겐 처가가 되겠지. 그리고 와서 치대면 우리도 피곤하다. 나중으로 갈수록 피차 편하고 재밌게 놀자. 엄마도 쉬어야지’.

친족들은 소중한 버팀목이고, 그들과의 정을 나누는 것은 즐겁고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명절이라는 한정된 기간에 괜히 몰릴 필요도, 그 과정에서 어느 한쪽의 고생이 꼭 따라야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명절의 부담을 줄이고 나니, 평소에 서로 편한 시간을 맞춰 외식을 하거나 왕래하는 새로운 기회가 생겼다. 부담이라는 장막을 거두고 난 자리에는 정말로 반가워서 좋은 얼굴들이 남는다.

어떤 가정도, 어떤 가정의 상황도 남에게 완벽히 이해받을 수는 없다. 다만 내 스스로의 신념과 행복이라는 기준에서라도 최소한 납득이 가도록 집을 가꾼다. 적어도, 나에게라도 일단 받아들여져야 상대에게 최소한의 양해와, 공감은 아니더라도 이해까지는 바래 볼 염치가 있을테니까. 그리고 그런 협상의 측면은 제쳐두더라도, 나의 환경은 나와 함께할 사람이 편하게 들어와서 행복하게 어울릴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나는 Habitable한 사람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집을 잘 가꿔 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순간 만족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확인하고 노력해야 한다. 나의 세계가, 나의 사람이 살기에도 행복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