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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전_01

Neon Fossel 2020. 2. 13. 12:43

호롤로 녀석은 불성 이후로 접었다가 (복귀 당시 군단 말)다시 하는거라서 65부터 렙업중이었다. 그래서 첫 방송구경에서는 던전이나 레이드 등을 볼 순 없었다. 대신 퀘스트를 하면서, 이 게임이 옛날 그래픽이자 옛날 느낌이 나는 건 맞지만 그 디테일이나 감성은 요즘 게임이 따라올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했다. 처음엔 잘 몰랐지만 신나서 설명하는 동생에게 '어 어 그래. 그런 것 같다 진짜' 이렇게 맞장구를 반 억지로 쳐줬다. 그런데 점점 그러다보니 나에게도 그렇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뭇잎, 지형, 하늘의 빛깔 등 옛날 느낌과 그림 느낌에 익숙해지다보니 그런 것들이 가진 섬세한 디테일이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덤으로 스토리까지 방대하고 재밌단다. 안 그래도 스토리와는 거의 무관하게 흡사 작업장을 반 수동으로 돌리듯 파밍기계가 되어가던 디아에 현타가 세게 오던 시점이었다. 그래. 그럼 딱 만렙까지 자유도 높은 판타지 영화 본다 생각하고 스토리 보면서 슬슬 해보자. 물론 그때는 만렙 이후의 그 전혀 다른 세상이 있을줄은 아예 알지도 못했다. 그냥 렙업하고, 스토리 보다가, 만렙 찍으면 자연스레 접겠거니 하고 시작했다. 초보자가 만렙 찍는 데에는 2-3주 걸린다니까, 2-3주 짜리 크루즈여행을 가는 느낌으로.

어차피 20레벨까지는 무료란다. 개꿀. 호롤로 이녀석은 나보다도 사람 구워삶는데 고단수다. 혹시 안 맞을지 모르니, 결제하지 말고 20까지만 해보란다. 그래서 아주 부담없이(?) 시작했다. 캐릭터 생성. 이전까지 로한, C9같은 몇몇 RPG를 하면서, 항상 제일 기본적이라 너무 어렵지 않고, 범용성이 좋으며 리스크도 적은 직업들을 했다. 라이트하니까 겜에서 고생하면 안 되거든. 어떤 게임이든 인간 전사가 대부분이었고, 가끔 달라져봐야 인간이랑 비슷한 종족의 마법사. 지금과는 다르게, 의외로 되게 전형적이고 따분한 취향.

근데 이번엔 달랐다. 혼자 렙업하기 편한 직업이 뭐가 있냐고 물었다. 도적이랑 냥꾼이 좋단다. 도적은 어떤 게임에서든 싫었다. 다재다능하고 센 건 어느 게임에서나 비슷한데, 게임 캐릭터도 내 자아의 아바타라는 측면에서 난 그렇게 얍실한 기회주의자 느낌은 질색이다. 지금도 얼라든 호드든 도적을 보면 묶어놓고 얼창이나 별쇄를 박아서 참교육시키고 싶다. 실제로도 도적만 보면 어그로가 확 끌려서 죽일때까지 쫓아간다. 정정당당하게 정면으로 맞다이치면 한방에 가루가 될 놈들이 치사하게. 그럼 남은 게 냥꾼이었다. 오히려 지금은 냥꾼 하는 사람들이 잘 이해가 안되거나 내가 냥꾼을 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한다. 드루나 법사처럼 다재다능하긴 한데, 쟤넨 다재다능함이 적재적소에 강점이 된다면, 냥꾼은 다재다능해서 다 어중간하다. 그렇다고 흑암조법처럼 시즌별로 미터기를 찢는 것도 아니고, 특유의 간지가 터지는 것도 아니고, 가장 인상깊은 특징은 펫이 어리버리를 타거나 본체가 잘 죽는다는 것 밖에 없는. 게다가 레이드든 쐐기든 굳이 냥꾼을 꼭 찾을 필요가 있는 시즌은 짧은 와생이지만 전무했다. 내가 와우에서 가장 늦게 건드리거나 안 하는 캐릭이 있다면 그건 냥꾼일 거다. 그런데 그때는 어차피 혼자 여행하는 판타지 소설 주인공 시점으로 게임을 할 거라 묘하게 어울리기도 하고, 나쁘지 않았다. 만렙 이후 냥꾼의 저런 미래를 몰랐기도 했고. 종족은 역시나 인간(...)이고, 냥꾼을 만들었다.

진영은 딱히 고민하지 않았다. 추천한 호롤로 동생도 “형, 와우는 얼라야” 라고 단호하게 말했었고, 난 그때나 지금이나 내 아바타는 정의롭고 못 생기지 않게, 멋진게 좋으니까. 시작할 때 잘은 몰랐지만 호드는 그냥 대놓고 ‘적’으로 만든 게 뻔해보였다. 요즘 고이면서 와우 스토리 토론장 같은데를 보면, 실제로 워크래프트에서 호드는 그냥 야만적인 침략자 내지는 빌런 저장소 정도밖에 안 됐었다. 그걸 와우에서 동등한 두 진영간의 대립과 선택이라는 지위로 갑자기 격상시키려다보니 호드 유저들이 바라는 정의로움과 대의명분이라는 아우라가 잘 그려지기 힘들고, 블자가 중간에 어느정도 노력은 했지만 가끔 대족장급을 그냥 죽여서 소모하는 걸 보면 아직 호드 스토리에 대한 처우나 관심은 갈 길이 멀다는 분석이 있긴 했다. 어쨌든, 그때는 얼라가 멋있고 예뻤다. 물론 지금도 얼라는 그렇다. 다만 이제는 호드 종족은 좀 적응되며 무뎌져서 싫지 않은 정도이다. 그리고 호드에 와서 만난 사람들과 사람. 함께 만들고 있는 소중하고 재미있는 경험들 때문에 정이 많이 들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