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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된 피 사건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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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생뚱맞게 예쁜 '코로나' 사태가 지속되는 요즘이다. 비근한 예로 메르스, 사스, 그리고 멀게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수많은 '역병'들, 천연두, 유럽 인구의 거의 1/4~1/3을 실질적으로 궤멸시킨 페스트(흑사병)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현실을 굉장히 사실감있게 구현한 게임인 와우(World of Warcraft)에도 '오염된 피 사건'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위 링크에 정리되어 있다. 요지는 현실세계에서 전염병 등의 재앙이 창궐할 때 발생하는 인간들의 군상이 거기서도 똑같이 재현되어 사회심리학적 연구주제까지 되었다는 것.
이런 현상이 발생했을 때, 내가 생각하는 대강의 흐름은 이렇다. 전염병의 확산정도와 인간 사회의 지각이라는 두 축의 매트릭스이다.
1. 초기 발병과 확산, 존재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함
2. 지수적(Exponential)으로 폭증하는 확산, 인지했으나 늦음
3. 최대치에서 소강상태, 인지 및 시스템이 확산을 간신히 따라감
4. 확산의 ‘증가율’이 감소, 대부분의 인간사회가 인지하고 시스템에 의해 관리가능한 상태
5. 절대적 감염량의 감소 및 완전 박멸, 그리고, 일부의 배움과 대부분의 망각 시작
현재 우리는 2-3. 단계를 오락가락하는 상태이다. 미국은 감염자가 10만을 넘었고, 우리 한국도 대구에서 다시 대규모 확산 사례가 발견되었다. 한국은 증가율이 감소하는 추세였지만, 그마저도 깨지고 다시 아랫단계로 되돌아 간 것. 그나마 우리나라보다 행정이나 의료시스템의 질이 낮거나 사회 시스템 장악력이 부족한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대목에서 요즘 흔히 비난받는 서구세계의 시민의식(사재기로 생필품 부족, 부주의한 모임이나 행사 지속 등)과, 그에 반해 떠받들어지는 우리 나라의 선제적이고 선진적인 시민의식과 행정/의료시스템이라는 평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객관적으로 인정할만한 긍정적인 점은 이렇다. 우리나라는 실제로 전세계 200여개국 중에 최고 수준의 의료시스템과 행정력을 가지고 있다. 시민의식 차원에서도 이 민족이 동아시아의 중세부터 중국과 일본과 서구열강을 비롯한 강자들에게 무수히 많은 외침을 받으면서도 버텨온 것, 그리고 한국전쟁과 IMF라는 실질적 국가 멸망과 국가 부도, 정부 실패라는 위기로부터 유례없는 속도로 회복과 극복을 한 것 모두 분명히 인정되어야만 하는 독특한 민족성과 시민의식이다.
다만 서구세계를 무턱대고 비난하며 우리 어깨가 으쓱하고 우쭐하는 것은 다소 위험하기도 하고, 그 내막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국가와 민족이 상당기간(홍보적 문구를 굳이 차용하자면 5천년) 일치한 몇 안되는 국가이다. 그러다보니 굳이 후진적인 의미라기보다는, 그 당시부터 사회적으로 학습된 민족성과 시민의식은, 사회계약론에 기반한 근현대 시민으로만은 설명될 수 없는 링크가 과거로부터 더 이어져있다. 쉽게 말해, 우리는 현대 시민이기도 함과 동시에, 아직도 ‘대통령=왕, 시민=백성, 국가=천부적이고 당연한 존재’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민족적 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부가 사회 시스템에 상당부분 간섭하거나 부하를 줘도, 같은 정도의 유사 사례와 비교했을 때 저항이 적고 관리가 용이한 편이다. 민주화 항쟁, 최근 두 번의 탄핵시도와 탄핵이라는 숭고하거나 역동적인 자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나라였으면, 애초에 그 지경까지 가도록 그 멍청한 권력자들이 주무르기 전에 시민사회가 못 견디고 들어엎었을 일이다.
이러한 민족적 관성에 더해, 한국은 좁은 국토에 그나마도 인구가 밀집해있으며, 그 와중에 교통과 통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렇다보니, 정부 입장에서도 행정력을 실현하여 사회를 관리하기 용이하고, 시민들 입장에서도 그게 익숙하며 정부가 할 최소한의 역할에 대한 신뢰만큼은 최소한 다른 나라에 비해 두터운 편이다.
반면 미국을 비롯한 서구세계는 그렇지 않다. 미국은 아직 300년이 채 되지 않은, 인종의 용광로같은 이주자들의 나라이다. 유럽은 수백년동안 지도가 수백 번은 바뀌며, 민족과 국가가 일치한 적이 몇십 년 혹은 몇 년도 안 된 적이 부지기수다. 그러다보니 이들에게는 우선 현대의, 현재의 국가와 굳이 연결된 민족적 관성이라는 링크가 약하다. 게다가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국토는 우리나라보다 조금 더 혹은 굉장히 넓은데 비해 인구는 상대적으로 분산되어 있으며, 교통과 통신은 그나마 비슷한 나라가 몇 있거나 대부분 우리나라보다 못하다. 행정력이 뻗치지 못하는 물리적 공백이 명확하다. 이 두 특성을 조합하면, 서구세계에게 국가는 ‘세금과 희생된 자유를 대가로 계약된 공공서비스를 이행하는 조직’ 딱 거기까지이며, 그마저도 시민 스스로가 자구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중-단기적 재해 등의 위기때 수시로 위험에 노출된다.
하다못해 폭설이 오거나 산불이 나도, 우리나라야 정부나 주거 관리단체 등에서 알아서 치워주고, 금액부담은 전혀 없는 소방시스템이 수 분 내지는 수십 분 내에 해결을 하니, 시민들이 굳이 집에 비상식량이나 기타 중기 생존물품 등을 구비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게 대부분이다(물론 그런 우리나라에서도 최소 7-30일의 생존물자는 평시에도 비축하라는 것이 정부의 권고사항이다). 반면 미국을 비롯한 서구세계는, 폭설이나 산불 혹은 홍수 등의 재해가 우리가 보기에 그닥 심한게 아니더라도 최소 반나절에서 길면 며칠-몇 주까지도 고립될 수 있다. 실제로 살아본 곳도 그랬다. 비단 격오지에 사는 몇몇만 그런 게 아니다. 맨하탄, 브루클린, D.C.,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등 몇몇 주도를 제외한 나머지는 도심권에 산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가 붕괴해도 정부가 찾아와서 손을 내밀고 지탱해준다고 믿기가 어렵다. 감정적으로 좋고 싫고를 떠나서, 그게 당연하고 습관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총기소지만 봐도 알 수 있다. 단순히 중간 단계에서 총을 찍어내는 극우 보수단체가 로비를 해서만은 아니다. 그들에게 표를 찍는 미국 시민의 꽤 다수는, 자기의 안전을 정부의 경찰력에 온전히 의존한다는 것에 불안을 느낀다. 남미와 제3 세계는 말할 것도 없지만, 하다못해 미국만 해도 법보다 주먹(총)이 가까운 경우가 종종 있으니.
내가 속칭 '북미 문화권 빠'라서 무조건 욕먹는 미국사람들 감싸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들이 저렇게 행동하는 그 모티브와 환경이 그저 '그래서 그렇다'라는 생각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역사에서 언제나 그랬듯, 격동과 위기는 누군가에겐 기회가 된다. 그래서 그 기회를 틈타 누구 탓이다, 뭐는 어떻게 해야 한다, 결국 우리가 의지할 곳은 신 밖에 없다(?) 등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진다. 루머와 추측과 음모는 무지에서 오는 불안과 공포를 먹고 자라서, 진실보다 더 진실같은 신념으로 둔갑한다. 이럴 때, 우리는 '옳다, 그르다, 좋다, 싫다'라는 아우라를 벗기고,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이해와, 어떤 주장과 조치로 실질적 이득을 보는 것은 어느쪽인지를 면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의외로 숭고한 면을 가진 채, 그렇다고 어느 한 동네가 그렇게 고매하지도 않다. 마지막으로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의 인터뷰를 인용한다.
"앞서 2008년 금융위기와 2014년에 에볼라가 창궐했을 때 책임 있는 리더의 역할을 맡았던 미국은 지금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2016년 선거로 당선된 트럼프 행정부는 시작부터 미국은 전 세계의 리더가 될 생각이 없다고 천명했습니다. 전 세계 많은 나라와 친구로 지내는 데도 관심이 없으며, 오직 미국의 이해관계만 최우선으로 놓고 행동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죠. 미국이 설사 이번 사태를 계기로 다시 리더가 되겠다고 나서봤자 예전처럼 미국을 따르는 나라는 많지 않을 겁니다. 세상에 “나만 소중하고, 내가 제일 먼저야!”라고 외치는 이가 리더로 성공한 사례는 없거든요."
(...)
"사람들이 정보를 믿지 않고, 정보를 제공하는 주체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결국 그 정보와 지침을 따르도록 사람들을 강제하는 수밖에 남지 않습니다. 이건 강력한 감시 체계가 뒷받침하는 전체주의 정권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가 정말 큰 위험을 내포한 문제인 겁니다. 부디 인류가 그 방향으로는 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인터뷰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