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이었다. 3연작 프로젝트 중 두 번째다. 일전에 화상미팅으로 몇가지 컨셉을 잡고, 밤에 혼자 들으면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음침한 목소리(...)와 피아노 하나로 된 데모를 들으며 코드 플로우와 실제악기 및 가상악기 구성을 어레인지 해줬다. 꼬박 3주간 일주일에 2-3일 정도의 시간을 온/오프로 잡아먹은 일이다. 어차피 보컬과 콰이어의 수가 많아서 굳이 악기가 복잡하고 빡빡하게 갈 필요가 없는 구성이었다. 중간에 음악감독이 4회차까지 연습을 해보고는 강남에 있는 스튜디오로 불렀다. 좀 더 세련된 느낌으로 갈 수는 없냐고. 난 분명히 말했다. 보컬이랑 콰이어가 적으면 모르겠지만, 피아노나 기타 등 악기의 반주코드를 대체코드로 도배를 해서 기깔나고 세련되게 바꾸면, 거기에 맞춰서 20-30명의 보컬과 콰이어는 성부를 다 맞춰서 꼬아가며 노래를 불러야한다. 그래서 안 된다고 했다. 아예 합창 지휘자를 써서 코칭을 할 게 아니지 않냐고. 프로젝트 예산 빡빡한 걸로 아는데.
그날은 잘 알아듣는듯 하다가, 그 다음주엔 홍대에 있는 녹음실에서 또 똑같은 얘기다. 어차피 한 두 해 하는 사람들 아니라서 충분히 따라올거라고. 두 시간을 서로 벽보고 얘기하듯 챗바퀴가 돌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in charge도 아니고 out-source인데, 굳이 이 프로젝트의 앞날을 걱정해서 이 사람이랑 이 이상 입씨름을 해야 하나. 그래서 알겠다고 하고 열 다섯 곡 정도의 악보를 싹 다 뒤집었다. 그때부터 현악 파트에서 첼로랑 퍼스트, 세컨 건반이 볼멘소리를 하는 게 뭔가 찝찝했다. 그래도 자기네 감독이 나한테 시킨거니까, 알아서들 쇼부봤겠지 싶었다. 그게 문제였다. 매 연습때마다 현악 파트에서 손이 꼬인다고, 굳이 aug코드까지 써가며 비틀어야겠냐는 둥 말이 나왔다. 나야 오프연습은 2주에 한 번 정도 들여다보면 그만이긴 했지만, 연습이 끝난 밤마다 굳이 징징거리는 소리를 연락으로라도 전달받았다. 그때마다 음악감독은 쟤네 저러다 말테니 신경쓰지 말라고.
그러더니 떡하니 목요일에 다분히 사무적이고 담담한 어조로, 현악 피드백을 다시 채택하라는 둥 어이없는 피드백을 거꾸로 나한테 하고 있다. 어쩌라고. 리허설용 초벌 가이드 녹음까지 다 끝난 걸,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째로 들어엎으라는 소린가. 그나마도 요즘 코로나라고 콰이어 연습도 세 명, 다섯 명으로 쪼개면서 무기한 연기되며 기약없는 공연을 축축 늘어지는 속도로 간신히 준비중인데, 이제와서 또 뒤집으라고? 그래, 중간정산때마다 건별 정산하고 아모른직다 꽁무니 빼면 그만인 나같은 프리랜서가 봐도 이지경인데, 당신이랑 한 배를 타서 밥줄 매달고 있는 팀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네.
현악파트의 의견을 다 반영했을 때, 예상되는 변경사항을 대강 보여줬다. 아니나 다를까, 보컬&콰이어 마스터가 득달같이 달려든다. 원칙적으로는 감독이 하라는 대로 하면 그만인 나같은 외주한테 화를 낼 순 없으니, 감독에게 직접 들이받는다. 닭 쫓던 개가 지붕만 쳐다보는 꼴도 아니고, 이제 두 달째로 접어드는 기간동안 성부를 두 개 네 개로 쪼개서 화음까지 맞춘 걸, 열여덟마디 빼고 다 바꾼다는게 말이냐 당나귀냐 등등등. 근데 감독은 이 난리통을 펼쳐놓고는 누가 이기나 보자는 식으로 현악이랑 보컬의 싸움 앞에서 팝콘이나 뜯고 있다. 리듬이랑 안무쪽은 그나마 영향이 덜해서인지 초반엔 가만히 있다가, 필요에 의해서는 순서나 길이를 건드릴수도 있다는 근거없는 폭탄발언을 현악에서 뱉는 순간 아수라장에 합류했다. 그렇게 네 시간을 치고받고 입씨름을 하다가 지쳤다. 어차피 대낮에 한가하니까 다들 몇시간씩 신나게 싸우는 것 같은데, 녹음실로 모여서 직접 들어보고 얘기해보자고 불렀다. 이 짓을 감독이 아니라 왜 내가 해야겠는지 모르겠는데, 그랬다. 딱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겉으로는 없었지만,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게, 꼭 내 능력이 의심받는 것 같아서 갑갑하고 짜증났다.
녹음실에 모였다. 나보다 최소 한 살 이상은 많고, 스무살이나 열일곱부터 밥먹고 이것만 한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답없이 배째고 서로에게 땡깡을 부린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다, 오히려 그래서 고집과 아집이 센 건가. 기존은 어떻고, 바꾸게되면 어디는 어떨지 콕콕 집어가며 약식으로 연주를 하고 들었다. 그리고 양쪽에다가 번갈아서 호통을 쳤다. 보컬은, 화성을 더 어렵게 가자는 것도 아니고 다시 쉽게 가자는 건데, 어차피 공연 연기 때문에 연습이 늘어지긴 해도 리허설 마감이 오히려 여유롭기도 한 것 아니냐. 그거 하나를 양보 못하냐. 현악은, 몇몇 크리티컬한 부분만 수정을 해달라고 하지 꼴랑 인터벌 쉽게 돌리고 실수 줄이려고 곡의 대부분을 뜯어달라고 하면 저기 보컬보러 어쩌자는 거냐. 그리고 상식적으로, 십오년에서 이십년 가까이 그걸로 밥 벌어먹는 사람들 입에서 손 포지션이 불편하다는 소리가 어떻게 나올 수가 있느냐. 어렵게 수정을 한 이 버전마저도 내가 여태 문제 없이 해온 다른 케이스보다 오히려 쉽게 가는 건데, 수억씩 집안 기둥뿌리 뽑아가면서 버클리까지 가서 배웠다는 전공자들 프로페셔널리즘이 이거밖에 안 되는 거냐. 내가 연주를 안 하는 사람도 아니고, 나같은 아마나 세미프로한테 이런 소리 들으면 좋냐고. 나같으면 존심 상해서라도 그렇게는 말 못하겠다고.
일단 들어보고 나서, 각 이슈별로 롤백하는 게 득/실 중 어떤게 더 큰지 따져서 2차 수정안의 뼈대를 잡았다. 그 사이에 너댓번씩 계속 같은 말로 싸우려 들 때마다 역시나 같은 말로 팩폭해서 말렸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먼저 싸움을 걸거나 선빵쳐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이 평생을 말리고만 산다. 다행이지만 지겨운 굴레. 비 오는 날 다들 갑자기 끌려나와서, 다섯시간 남짓을 그러고 나니 기진맥진해졌다. 술이나 한 잔 하면서 풀잔다. 1. 어지간하면 술 한 잔으로 풀고 싶은데, 오늘은 당신들이랑 더 얼굴 보면 내 머리가 녹아내릴 것 같아서 싫다 2. 다들 차끌고 왔으면서, 이러면 대리비만 도합 18만원인데, 얌전히 들어가고 그 돈으로 파트 멤버들 나중에 간식이라도 챙겨줘라.
어차피 어떤 일을 할 때든 이보다는 더한 강도와 빈도로 사람 사이에 시끌시끌하긴 했다. 다만 요즘 좀 연달아 순탄해서 방심을 했었나. 별 일 없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