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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aning

Neon Fossel 2020. 5. 26. 19:28

인간은 창조자라는 무척이나 심심했던 노친네의 형상(image)을 본따 만들어졌다. 이 인간의 초기 프로토타입에는 창조자의 외형 뿐 아니라 흥미롭고도 본질적인 기능이 기본으로 탑재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말로 이루어내는’ 능력이었다. 창조자가 그러했듯, 필요한 물질이나 현상을 수식이나 코드를 입력하듯 말하면 그대로 이끌어낼 수 있었다. 창조자 입장에서도 편리했다. 초기 인간 집단에서는 잘되든 잘못되든 어차피 수십, 수백이 죽거나 다치는 것 정도가 다였으니까. 매번 가타부타 승인하느니 그냥 자유이용권을 줬다. 무제한 라이센스. 허가제가 아니라 신고제.

그러다 인간이 조악하게 만들기 시작한 기술이 발전하고, 인간 사회가 복잡해지며 서로에 대한 노출이 쉽고 잦아졌다. 이제는 말하는 모든 게 그대로 이루어지게 두면 안 되었다. 어떤 멍청하고 충동적인 말 한마디가 종을 멸망시킬수도, 사회적이며 개인적으로 인간을 잔인하게 난도질하고 매장하며, 어떤 결실의 가능성을 묵사발로 만들기가 쉽게 되어버린 것이다.

창조자는 세월에 따라 세 버전의 장치를 고안했다. ‘마법’, ‘신’, ‘사랑’. 이제 이 장치들을 거치지 않고는 사람이 평소에 뱉는 말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대별로 인간에게 불리는 이름과 매커니즘은 조금씩 달랐지만, 세 장치가 검증하는 단 하나의 공통적인 것은 같았다.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에 작던 크던 어떤 변화를 일으킬만한, ‘항구적인 의지가 진정으로 있는지’였다.

이를 스스로의 내면에서 찾아 쓴 이들에게 사람들은 마법을 부린다고 했다. 내면이 아니라 창조자를 ‘신’이라는 구체화된 추상체로 상정해서 능력을 사용하는 이들은 제사장이나 사제라고 불렸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인간이 스스로의 내면을 고독하게 탐험하기보다는 ‘신’이라는 추상체에 의지하는 것을 편히 여기면서, 마법은 점차 힘을 잃었다. 정확히는 아무도 찾지 않으니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 기술과 철학이 발전하며 인간들은 스스로가 만든 ‘신’의 존재를 극복하다 못해 ‘신을 죽였다’. 신은 그렇게 인간 스스로가 만들었다가 폐기한 안전장치이자 능력의 발현 수단이었다.

이제 남은 건 ‘사랑’뿐이었다. 문제는 이 사랑이라는 수단이 검증기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초보적인 실수는 제외하더라도, 그것이 사랑이라고 한들 ‘항구적인, 진심’이 아닌 형태와 정도도 많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말들이 때때로는 덧없이 스러지기도 하며, 때로는 기적이나 운명이라는 말로 표현될만큼 힘을 가지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미 말하는 순간 그것이 ‘의미’를 발현함에도 불구하고 굳이 의미중복적인 표현을 덧대어, 자신들의 말에 스탬프를 찍는다.

I ‘mean’ it.

We are ‘meant’ to be.

You have my ‘word’.

마법과 신이 사라진 세상에,
인간이 스스로의 프로토타입이 가졌던 능력을
간신히 붙잡는 단 하나의 위태로운 방법

Meaning love

 

p.141, <쓸모없음의 쓸모, 쓸모있음의 허울뿐인 아우라에 대한 사전>, Neon Fossel,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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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따라 만들었다. 근데 사전이라기보다 소설처럼 써진듯. 원래는 이런 단순한 상상이었다.

“인간은 원래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능력을 가진 존재였을 수 있다. 마법 주문을 굳이 ‘Spell’이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다만 안전상의 이유로, 그 요술지팡이를 휘두를 자격을 박탈당하거나 제한당하고 있을 뿐이라면, 아직도 그 능력이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