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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들어오지 말고 있어봐

Neon Fossel 2020. 5. 29. 01:36

진. 외자다. 철권 남캐 ‘진’이랑 이름이 똑같다. 두껍고 길쭉하다. 못생기진 않았다. 거의 항상 잤다. 찍는 것보단 시험을 잘 봤는데, 그렇다고 공부를 한 점수도 아니었다. 그냥 ‘사람 말은 알아듣나보다’ 싶었다. 별로 노는애 티는 안 났는데, 가끔 쉬는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내일이 없는듯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하는 양아치들이랑 같이 다니는 애였다.

처음 짝이 됐을때도 둘 다 어색하고 시큰둥했다. 그러다 그나마 조금 친해지자, 내가 수업 시작때 애들 인사시키거나, 귀찮은 발표나 대답을 잘 해내고 나면 ‘잘했어 라이코스’라면서 강아지 상 주듯 어깨를 툭 툭 쳐주고는 그냥 또 잤다. 그럼 나는 ‘뭐야, 니가 내 엄마냐’, ‘너도 심심하면 좀 잘 해보지’라면서 그냥 하던 걸 했다. 나에게 진이는 노는 애 중에 이상할 정도로 심심하고 얌전한 애였고, 진이에게 나는 노잼 범생이중에 그나마 말이 통할 것 같으면서도 귀찮게 굴거나 꼰대같이 참견하지 않는 친구였다(고 하더라).

그러던 어느날, 6교시가 끝나고 종례 전에 청소하는 시간이었다. 그날따라 아침부터 담요를 친친 말고는 하루종일 더욱 더 꼼짝 안하길래 ‘이젠 아예 겨울잠을 자는구나, 니가’ 싶었다. 오늘도 분명히 어딘가 구석에서 청소를 안 하는 하이에나 같은 새키들이 있을거니까, 가서 적당히 말동무를 해주며 구슬려서 청소를 시키려고 일어나던 참이다. 엎드려서 뭐라고 웅얼거린다.

‘₩@;₩/@/;@:&/.....’.

“뭐라고?”

“나 오늘 생리한다고.”

ㅇ ㅓ... 어... 가정 수업에서 임신과 출산 단원까지도 매우 열중해서(?) 들었기 때문에 시험도 잘 봤고, 그게 뭔지 머리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액츄얼,휴먼,맨카인드,피메일한테,버벌하게,생생하게,그것도 자기 상태라면서,면전에서 듣는건,

처음이란 말이다.....

당황한 티를 내면 너무 애같을까봐 일단 겉으로 침착한 척을 하고 다시 앉았다.

“괜찮냐”

“아니, ㅇ ㅏ... 앟... 으으 아프다. 쿡쿡 쑤셔.”

그러면서 두 세번 움찔 움찔 한다.

“아으... 아파. 또 조금씩 나오는 거 같은데.”

오마이갓... 상상이 비슷하게라도 전혀 되지 않는 고통을 이렇게 겉으로만 생생하게 봐야한다니. 걱정도 되고, 얘 큰일 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무섭고,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모르는 스스로가 매우 멍청하고 쓸모 없게 느껴졌다.

“양호실 데려다줄까”

“아냐, 그냥 내비둬. 청소할 때 내 자리 책상 밀지 말고 냅두라고만 해줘.”

“그래. 아파서 못 참겠으면 전화 하던가, 교실에 아무한테나 방송으로 나 찾아달라고만 해.”

뭔가 비밀과 안전의 수호자(?)가 되어야 할 것 같은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며, 바닥청소하는 애들한테 아예 모든 책상을 밀지 말고 오늘은 대충 쓸고 닦자고 말을 했다. 담임이 뭐라 하면 그냥 내가 청소를 늦게 시켜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라고 했다. 쟤 혼자만 아프다고 둘러대면 분명 쓸데없이 시선이 집중될 것 같았다. 그래서.

계단이랑 복도랑 화장실을 한바퀴 둘러봤다. 역시나 대충 떠들면서 시간만 때우는 하이에나들을 물리적/정신적으로 참교육 시키면서도, 생각은 온통 거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걔는 괜찮을려나’. 다른때보다 빠르게 둘러보고 다시 교실로 향했다. 교실 문이 보일 때쯤, 핸드폰으로 전화가 온다.

“여보세요”

“어, 웬일로 전화냐. ... 아참, 뭐야, 아파...? 나 지금 교실 거의 다 왔는데, 빨리 갈게. 끊는다.”

“아, 아냐아냐. 그냥. 애들 청소하는데 혼자 엎드려 있으려니 뻘쭘해서.”

“더 아프진 않아? 진통제라도 좀 먹거나 양호실 가서 편하게 눕지. 나 어차피 들어가. 나 들어가면 그 뒤에 애들 슬슬 들어오니까 안 뻘쭘하고 괜찮을거야.”

“잠깐만, 들어오지 말고 있어봐봐.

근데,

너 목소리 되게 좋다. 갑자기.”

“...? 뭔소리야. 나 그럼 들어가/말어? 얘기해/닥쳐?”

“잠깐 밖에서 목소리로만 얘기해. 그게 더 집중된다. 희한하게 덜 아프네.”

“막상 이러니까 할 얘기 되게 없네.”

“그 말 할때도 목소리가 좋네.”

“...어디 아프냐? 아, 아프지 참. 징그럽게 왜그러냐... 근데 그럼 무슨 얘기 해줄까.”

“애들이 너 이번 축제때 밴드 데리고 나온다던데. 그거 얘기해죠.”

“아... 지금 연습중이고, 피아노 베이스 드럼만 나와. 기타는 옆학교까지 다 뒤져도 쓸만한 애가 없어서. 노래는 피아노랑 드럼 치는 애들이 돌아가면서 부를거고. 중간에 베이스만 솔로로 4분을 끌고가야 되는 곡이 하나 있어. 처음엔 솔로 아이디어가 없어서 문제였다가, 나중엔 오히려 욕심이 많아져서 골라 넣는게 문제네. 그리고 할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치게 되는 게 은근 복불복이야. 요즘 학교 끝나면 숙제랑 시험공부만 간신히 하고 나머지는 계속 그것만 해. 근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다보면 맨날 새벽 두시야. 재밌어. 이정도면... 됐나...?”

“으응. 신기하다. 듣고 있으면 막 편해져. 다 괜찮아지고. 부드럽고 묵직한데, 어... 사근사근하고 다정하고 똑똑한 느낌?도 있어. 듣다보면 아픈 걸 계속 까먹어. 흐흣. 좋다. 목소리. 왜 여태 몰랐지...?”

“주로 항상 니가 자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목소리를 들어서 잔 거 같기도 해. 편하고 나른하거든.”

“아, 심지어 해가 떠있는 모든 시간에 잔 게 다 나 때문이다?”

“나 전화 또 해도 돼?”

“너 하는 거 봐서.”

그 뒤로 이상하게 생리와 관계없이도 여자와 남자의 아랫도리에 대해서 토론(?)을 많이 했다. 그것도 꼭 청소시간에, 서로 교실 벽을 사이에 두고, 굳이 전화로. 흥미로운 친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