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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_01

Neon Fossel 2020. 5. 31. 11:01

일출이랑은 묘하게 다른, BMNT라는 시각 개념이 있다. Beginning of the Morning Nautical Twilight. 해수면 기준으로 정말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좀 더 엄연한 의미의 '일출'이거나, 아침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도 뭣도 모르고 외우다가, 궁금해서 일할 때 빌려보던 장교들 전략기술서 인덱스에서 찾아봤다. 그래서 이 시간 직전에, 근무조와 상관없이 전방의 모든 부대원은 철책 근처를 미리 나가서 순찰 돌고 있어야 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해가 뜨기 시작해서 북한과 서로 보이게 되면, 밤 사이에 우리는 이렇게 빡세게 지키고 있었다고(서로 구라인지 다 아는 뻔한 보여주기) 위협을 하는 것. 그리고 해가 뜨기 직전은 곧 밤이 가장 무르익었을 때라서 역설적으로 가장 어둡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경계를 강화하는 목적도 있다. 그 때 각각의 담당 구역을 절반으로 나눠서 오른쪽-왼쪽으로 다른 부대의 구역이 시작되는 지점까지 걷는다. 그러다 다른 부대와 똑같이 마주치면, 서로 책임자끼리 서명과 각 부대의 징표를 교환한다.

 

내가 보따리상처럼 두 번째로 옮겨간 전방 부대는, 담당구역 오른쪽(남쪽) 끝이 육군 부대와 맞닿아 있는 예하부대였다. 내가 전방 부대에 갔을 때 그들이 환영하는 묘한 포인트가 하나 더 있었는데, 나는 '간부간주병'이기도 했다. 지들 멋대로 만들어 준 또 하나의 이중 소속 때문에 비밀취급 등급이 간부랑 똑같거나 더 높아서, 간부가 굳이 필요한 몇몇 활동에 간부 대신 티오를 채워줄 수 있었다. 병들이 모여있는 어떤 활동에도 간부는 무조건 한 명 씩 있어야 한다. 차를 탈 때도 운전병만 타거나 운전병과 병만 탈 수는 없고 간부가 무조건 동승해야 한다. 그런 것들을 굳이 간부 한 자리를 쓰지 않아도 내가 대신 하면 됐었다. 사실 급할 때 일을 더 편하게(빡세게, 많이) 하라고 넣어준 등급이라서 나한테 득될 건 없고, 남들만 편한 장치였다. 그래서 전체 순찰을 돌 때도, 한 쪽은 내가 나가면 간부 한 명은 비번으로 쉴 수 있었다. 그날도 빛이 보이기 직전, 가장 어둡고 가장 추울 때, 앞에 보내 놓은 척후병 하나의 뒷모습을 따라 돌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철책을 의무적으로 툭툭 쳐보면서 걷고 있었는데, 척후병이 걸음을 멈춘 게 보였다. 누군가가 철모를 내리치고 있는지 철모가 통 통 하면서 앞뒤로 요동친다. '뭐지, 이 근처에 저렇게 할 만한 인간이 지나갈 일이 없는데'. 살짝 빠르게 걸어서 가까이 갔다. 척후병 앞에 선 사람의 계급장과 명찰을 봤다. 초록색 명찰 = 육군. 브이자 하나 = 하사. 이새끼가.

 

- 필.승.

- 어-이 츙성 - 이야 너는 못 보던 앤데, 무슨 장비가 막 키야ㅏㅏㅏ 고스트네 고스트.

- 무슨 일이십니까.

- 아니 이섀끼가 나보러 50미터 더 오라고 꼬장을 부리잖아.

 

부대별 경계를 표시하는 말뚝의 위치를 확인했다. 저들이 50미터 이상 더 오는 게 맞았다.

 

- 경계석 기준으로는 더 오셨어야 하는데.

- 이 슈발 너도 꼬장이야? 그리고 너넨 뭔데 간부도 없이 병신같은 병들끼리만 다녀어

- 꼬장이 아니라 원칙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간부간주병이라 상관 없습니다만.

- 니까짓게 뭔데 간부 간주를 한다는 건데

- 수도군단 직할 정보사령부 소속 ASIC/정보,첩보,보안 특기병입니다. 여기서의 편제는 해병대 2사단 선봉 1연대 선봉 1대대 대대본부 전투정보/지휘통제병 상병 한OO입니다. 소속과 성명을 밝히십쇼.

- 어쭈, 졸라 무서운데. 쒸바 안알려주면?

- 어차피 무전 한 통이면 조회해서 알 수 있는데, 그런식이면 많이 피곤해지실 겁니다.

- 지금 간부 협박하나?

- 협박이 아니라 원칙을 말씀드리는 것 뿐입니다. 작전계획 2027-05 수정 5호에 따르면, 저희 인접초소 258초소 감시장비 05k의 실효관측범위 2.5km, 그쪽 인접초소인 264초소의 감시장비 니콘의 실효관측범위 3.0km, 양쪽 부대 특수관측소인 OP에 각각 설치된 호크아이와 TOD의 실효관측범위는 현재 주간 기준 10km와 7.5km입니다. 해당 중첩 관측범위상 경계석이 유일한 공백 200미터 구간이고, 그래서 양쪽 부대가 취약시간에 직접 순찰로 맞닿으라고 지정해놨습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 몰라 이새끼야, 이게 미쳐가지고 날뛰네?

- 그리고... 제가 어쩔 수 없이 일하다가 인접부대 행동지침과 교본을 좀 읽어봤는데... 전방 경계부대의 경우, 언제든 실탄사격을 할 수 있도록 소총을 전방 대각선으로 들고, 실탄장전 및 안전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본인 포함 전 소대원이 소총을 어깨 뒤에 매고, 빈 손으로... 그냥 걸으셨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저희라고 멍청하고 편하고 좋아서 매일 총 앞으로 들고 쓰러질듯이 걷는 건 아닙니다만.

- 말 졸라 무섭게 하네, 그래서 뭐 어쩔건데?

- 저희쪽 CCTV에 이미 찍히셨습니다.

- 야, 잠깐만. 천천히 얘기해보자.

- 드릴 말씀 끝났고, 저희 애가 뭘 잘못했습니까?, 너. 니가 어쨌길래 저 '간부님'께서 저렇게 흥분하시는거냐.

 

(고개를 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 거리가 멀어서 목소리가 안 들릴 것 같길래, 수신호로 땡겼습니다.

- 이새끼가. 일단 말로 암구어 쏴보고, 못 듣는다 싶으면 수신호로 땡겨야 될 거 아냐. 너 같으면, 너보다 하급자가 이리 오라고 손으로 까딱까딱 하는거랑 다름 없는데, 그럼 좋냐

- 아닙니다.(또 고개를 숙이려 한다)

- 아이씨 그놈의 고개 진짜. 고개 들어. 확 목에 깁스 해버리기 전에. 관등성명 밝히고 사과해.

- 필승. 해병 2사단 선봉 1연대 선봉 1대대 본부중대 전투정보/지휘통제병 이병 박OO입니다. 죄송(찌릿-), 아니, 앞으로 암구어 수신 먼저 시도하겠습니다.

 

- 이쪽은 싸가지의 문제고, 그쪽은 군법의 문제인 것 같은데, 그렇게 알고 돌아가겠습니다.

- 아니 잠깐 얘기좀 하자고 쫌!!!!

- 얘기하다가 철수 더 늦으면, 그것도 저희 책임이라고 하실겁니까? 우리 해병대는 무식하게 힘만 세서 당신들보다 세 배 넓은 섹터를 같은 병력으로 막고 있는 게 아닙니다. 최소한 자기 부대랑 인접 부대의 감시자산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때의 행동지침은 뭔지는 알고 행동하십시오. 간부라면.

 

그리고, 앞으로 절대 해병한테 함부로 손대지 마십시오.

 

당신같은 저질 쓰레기 양아치한테 손찌검 당하려고 그 개고생 버텨서 해병 된 거 아닙니다.

 

부대장께 어떻게 보고할지는 생각해보고 결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