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나들이_02_edtd

Neon Fossel 2020. 6. 1. 12:07

(Sorting, Categorizing의 문제가 도처에서 터지고 있다. 글도, 플레이리스트도, 업무일지랑 개인메모도. 뭐든지 다 산발적으로 쏟아지는 통에 묶거나 정리는 커녕 넘버링마저 헷갈린다. 이 때 정줄을 잘 잡아야한다. 내 머리와 감정은 멍청할 수 있어도, 글과 기억은 연속성과 Integrity를 갖춘 나를 구성할 수 있게 한다. 제 때 로딩되기 위해서는 정리와 태깅이 필요하다. 미래의 나에게. 그러니까 미루지 말라고, 이 게으름뱅이야. 아직 더 몰아부쳐도 안 죽는다. 덩치는 산 만해가지고.)

전방 부대를 돌아다니면서, 매일 전화로만 목소리를 듣던 사람들과 실제로 만나보기도 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해보는 시간들이 좋았다. 그리고 은근히 내가 해줄게 좀 있어서, 사납고 무서운 그 사람들이랑도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인원이 잘게 쪼개져 있는 전방 부대에는 이런저런 취미나 공부에 도움이 될 사람 찾는 게 힘들다고 했었다. 그래서인지 오로지 한 가지 확실한 건, 운동만 죽도록 하는 애들이 정말 많았다는 것.

 

- 저기, 정보병

- 상병 한OO

- 저번에 너랑 근무 들어갔던 애가 그러던데, 너 기타 칠 줄 안다며?

- 그렇습니다

- 우리 부대에, 예전에 누가 쓰다가 그냥 놓고 간 기타가 있길래, 내가 요새 혼자 책 보면서 해보려 했는데 잘 안되네. 그리고 악보를 프린트 할 수 있는데가 없으니까, 다음 휴가때 여자친구한테 노래 불러주고 싶은데 연습을 못 하고있어
- 기타가 습도 관리가 안 돼서 넥이 휘어 있고, 튜닝도 나가 있습니다. 렌치랑 스패너 필요한데...
- (다른 애들에게)야, 저기 뭐냐 연장 가져와

뚝딱뚝딱. 간신히 장작을 악기 비슷한 상태로 만들었다. 활처럼 휘었던 넥을 렌치로 돌려서 휘어잡느라 나무가 뽀개질 지경이었다. 튜닝은 기준음을 어떻게 잡을까 하다가, 그 부대 간부중에 당시 처음 나온 아이폰을 쓰는 사람이 있길래 피아노 앱으로 ‘미’ 하나만 쳐달라고 해서 잡았다.

- 음, 기타 교본은 쓸데없는 기본기 연습이 많으니 제가 표시한 챕터만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악보는 제가 급한대로 가사 위에 마디랑 코드만 표시된 악보 바로 만들어 드릴테니까 그거 보고 하시면 충분합니다

- 그거 인터넷에서 보고 다 베껴써야 되는 거 아니야? 몰래 컴터 쓸 시간이 언제쯤 되려나

- 아, 그건 아니고, 제가 모르는 노래는 그냥 씨디로 노래만 두어번 들려주시면 됩니다

- 듣고 바로 된다고?

- 예. 그렇습니다.

- 너, 뭐, 절대음감 그런거냐?

- 아, 절대음감은 아쉽게 없습니다. 대신 상대음감만 있어서, 처음에 한 두 코드 틀려보면서라도 맞는 코드 하나만 찾아내면, 그 다음은 그 코드를 기준으로 멜로디에 어울리는 음정간격 거리감에 맞게, 맞춰서 따라가면 됩니다

- 뭔 소린지 모르겠네. 일단 한 번 해봐

- 하고 싶으신 곡 틀어주시면 됩니다

 

역시나 모르는 곡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차트 근처라도 지나가는 가요는 들을 일이 거의 없는데, 그나마 지금보다 그땐 더 심했다. 코드를 적으면서 따라가는 게 거추장스러워서, 그냥 음정간격을 숫자로 휘갈기면서 지나갔다. 6-4-1, 4-5-6, 4-2-5-1. 많아봐야 5-6코드에, 브릿지에서 빌드업하면 한 두 키 올라가는 그정도가 다였다. 다행히. 그리고 노래가 끝나고 나서 숫자들을 다시 코드로 바꿔 적었다. 그걸 본 선임은 괴물 보듯 기겁한 눈치였다. 그리고 내가 있던 본부랑 통화할 일 있을 때, 본부에 있는 자기 동기한테 신기하다고 얘기를 했나 보다. 본부 인사과에 있는, 나도 아는 선임이었다.

 

- 걔, 악보 그리는 거 말고, 그냥 기타만 치게 해봐. 하루 종일 진짜 아무거나 들이부어도 악보 하나도 안 보고 친다. 미친놈이야

- 헐 진짜?

 

그래서 그 이후로 서커스단 원숭이가 된 것처럼(?) 주말이면 신청곡처럼 들어온 난생 처음보는 가요 씨디를 산더미처럼 틀어놓고, 언제 틀리나 보자는 식으로 내 묘기를 관람하는게 전방 부대 선후임들의 꿀잼 컨텐츠였다. 중간에 소포가 와서 마음이 흐트러지는 바람에, 두 달 동안 한 번 틀렸다. 그동안 기타를 예닐곱 명한테 가르치고, 덕분에 케케묵은 가요 몇 곡은 알게 됐다. 덤으로 나에게 기타를 배운 조리병 선임이 항상 특식이나 야식처럼 밥을 따로 챙겨줬다. 본부였으면 택도 없을 일이다. 오히려 전방이라, 남는 재료 사용이 어느정도 자유로운 재량이라 가능한 거였다. 3식 조리사 자격증을 다 따고, 식당에서 일하던 요리사라서 그런지 정말 입이 호강했다.

 

나중에 보니, 그런걸 주로 부탁하는 사람들은 나보다 기수가 빠른 병장 선임들밖에 없었다. 후임들 중에서도 분명 필요한데 말을 못 붙이는 녀석들이 있을 거였다. 해병대에서 선임이란, 일단 물리적으로도 절대로 스치거나 건드려서도 안 되며, 선임이 먼저 허락하지 않은 한, 후임이 먼저 말을 붙이거나 뭔가를 부탁하는 것 역시 상상할 수 없는 존재다. 그걸 잘 알기에, 그때부턴 종종 시간이 날 때마다 내무실 여기저기 짱박혀서 굳어있는 후임들의 침대나 책상을 한번씩 둘러봤다. 이 아비규환에서도 기특하게 토익공부를 하는 애들도 있고, 여자친구나 가족한테 편지를 쓰는데 글씨랑 내용이 다 답도 없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래서 종종 지나가다가 문법을 설명해주거나 틀린 독해 문제를 풀어주거나 단어 외우는 방법 같은 걸 가르쳐주고, 편지는 수없이 수정해주다가 빡쳐서 몇 장은 대필해주기도 했다.

- 맞춤법! 마춤뻡! 마-춤-뻡! 이시키야. 으이구...
- 아 이것도 틀린겁니까?
- 그래 임마, 여자 입장에서 맞춤법 틀린 편지는 안 받느니만 못 해. 남자로 치면 고추가 섰다가도 도로 죽는 정도의 매력 폭망이란 말이다
- 워... 그정도입니까?
- 어, 그렇다고

- 너 저번에 휴가 복귀하면서 문신 지운다매
- 아 그게, 시간이 없어가...
- 건달이랑 나이트 삐끼 안한다매 이제, 그래서 내가 검정고시 공부도 도와주고 있잖아
- 안할겁니더
- 공부 안한다고?
- 아니, 건달이랑 삐끼 말입니더
- 너 다음 휴가땐 아마 내가 본부에 있을거니까, 너 복귀하면서 본부 들를 때 나한테 문신 지운거 확인받고 복귀해, 알겠어?
- 예 알겠습니더
- 이샊... 꼰티부리는거 같다?, 엎드려
- (엎드리며) 아닙니더

 

그러고나면 바짝 쫄았던 이녀석들은 귀엽게도 고마운 눈망울을 그렁그렁 비쳤다. 세상에 너네보고 어디가서 해병대라고 하면 안 믿을거야. 귀여워. 그리고는 또다시 귀엽게, 나보다도 적은 월급 받는 녀석들이 PX에서 과자랑 냉동식품같은걸 바리바리 싸들고 왔었다. 귀엽고 웃겨서 죽는 줄 알았다. 그래도 역시나 선임 입장에서 지킬 게 있다. 진급, 생일, 제대를 제외하고는 후임한테 평소에 절대 뭘 받아서는 안 된다. 후임에게는 주기만 해야된다.

 

- ㅋㅋㅋㅋㅋ 이거 나 먹으라고 갖고온거야? 내 월급이 너네 두 배야. 난 위험수당도 나온다. 그리고 이눔자식들 누가 선임한테 이런거 갖다바치래. 이거 다 가져가서 너네 후임들 줘

- 걔네 자꾸 뭐 주면 버릇 나빠져서 안 됩니다

- 너도 6개월 전까지 걔네랑 똑같았거든? 남일처럼 말하네 ㅋㅋㅋㅋ

- 그래도 뭔가 해드리고 싶어서

- 나중에 나 다시 본부 가면, 근무 설 때 구라치지말고 빠딱빠딱 보고 잘 하고. 휴가 나가면서 본부에 신고하러 들르면, 그냥 슝 가지 말고 와서 경례 한 번 때리고 가. 전화 할 때나 실제로 볼 때나 항상 친한 척 하고. 그럼 된다. 후임들한테 잘 해주고, 차라리 너네가 혼내더라도 타군이나 다른 부대한테 털리게는 하지 말고

- 알겠습니다. 근데, 곧 가십니까?
- 응. 좀 적응될만 하니까, 그만 놀고 슬슬 오라네
- 안 가시면 안 됩니까. 그냥 본부 소속 말고 3중대 하시지
- 그렇게 따지면 난 2중대도 해야 돼 ㅋㅋ
- 언제 가십니까
- 가면 간다고 얘기 하고 갈 거다. 걱정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