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여분 마스크를 하나 더 챙겼었다. 언제 어떻게 같이 있게 되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내 여자 or 그만큼 똑같이 중요할 가족을 지키기 위한 것. 그러다 요즘은 하나를 더 챙기게 됐다. 아예 모르는 누군가에게 한 번 정도의 기회를 더 주기 위해.
계기는 이렇다. 한 달 전쯤 버스를 타고 오는데, 가운데서 쌔액쌔액, 어떻게 들어도 너무나 몸이 아프게 들리는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술렁거렸다. 앞뒤에서 다들 고개를 내밀고 소음의 진원지를 찾는다. 가운데쯤 앉은,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였다.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았다. 사람들의 그런 반응을 보더니, 기사님은 구급차를 부르고 차를 세웠다. 그리고 사람들과 나는 직후에 대체목적으로 온 버스로 갈아탔다.
어찌 보면 한국에 사는 게 다행이라고 보일, 굉장히 체계적이고 빠른 대처가 엿보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숨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술렁이던 순간의 기류를 잊을 수 없다. 공포, 우려, 책망, 짜증, 분노가 섞인 그 눈빛들, 그 몸짓들. 살벌했다. 반면 나이가 많든 적든 그 할아버지도 잘못이다. 마스크를 쓰고 타지 않다니. 본인 건강에 대한 책임감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모두 내던진 것이다.
미국이었으면 마스크를 쓰지 않고도 뻔뻔한 사람 vs 그 사람을 비난하다 못해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 vs 그 상황을 중재나 통제하려는 근무자까지 엉켜서 난리가 났어도 여러 번 났을 상황이다. 그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었다. 내가 준 마스크를 받고, 남들도 안정을 되찾게 할 뿐 아니라 그 행동으로 그에게 기회를 주거나 혹은 책망하고 싶었다. 지금을 잊지 말라고. 당신의 무책임이 당신을 매장할뻔했던, 그 순간을 잊지 말라고.
그래서 요즘은 내가 쓰는 마스크 외에도 여분의 마스크를 두 개 가지고 다닌다.
무책임한 누군가로부터 서로를 지키고, 기회를 줄 용도의 한 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한 한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