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26, 오늘의 살롱 : 주제 - 앎이란 무엇일까, 제목(지식과 사람을 앎), 네온(Neon)
‘지식을 앎’
지식을 안다는 건,
1_ 그 지식의 ‘청사진'을 그려서 그 외적 한계와 내적 구조를 파악하는 것
2_ 그 지식을 모국어처럼 통시적으로 이해 및 적용할 수 있는 것
두 가지이다.
1_ 청사진을 그린다는 건, 다른 의미로 지식에 대해 메타적인 사고가 가능해야한다는 것이다. 학교나 직장에서 특정 개념이나 지식을 배울 때, 그 대상에 그저 파묻히거나 휩쓸려서 소화하기에만 바쁜 상황을 생각해보자. ‘어찌어찌 따라가긴 하는데, 이걸 내가 안다고 하진 못 하겠는' 지점. 여기서 우리가 안다고 하지 못하는 그 불안감이 드는 이유는, 이 지식이 세상 혹은 우주라는 전체 개념에서 어느 층위와 위치에 있는지, 그래서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커버하며, 그 지식이 설명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경계와 좌표를 명확하게 알 때, ‘안다’라고 하는 조건의 절반이 충족된다. 또한 내적으로도 그 지식이 어떤 흐름을 가지고 전개되는지 파악되어야 한다. 어디서 출발하고, 어떤 제약을 극복하고 설득하며, 그래서 어디까지를 설명하고, 어떻게 주장하는지. 이렇게 메타적으로 지식이라는 개체를 내려다보며 그 안과 밖을 민감하게 느껴야한다. 그래야 내가 ‘안다’라고 할 수 있다.
2_ 지식을 모국어처럼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 ‘1_’의 내적 구조를 파악하는 것과 연결된다. 다만 구조보다는 내용에 좀 더 초점을 맞춘 기준이다. 지식은 그것이 발원하게 된 동기와 상황이 있다. 동기(원천)은 상황이라는 ‘제약 혹은 과제’를 극복하거나 설명하기 위해 도구를 찾거나 만든다. 그리고 그 도구를 연쇄적으로 연결하거나 동시에 융합해서 상황을 극복하고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지식이라고 이미 알려져있다면, 그 설명이나 주장의 결과가 어떠했는지 이미 도출되어 있다. 이 흐름을 굳이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설명이 될 때, 지식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지식이 하나의 표현이나 언어처럼 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지식이 언어처럼 능동적 도구로 이해되고 장착되었을 때, 적용이 가능하다. 단순히 외우고 - 시험이나 과시로 확인받거나 인정받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삶 속에서 내 사고나 행동의 도구나 프레임으로 사용할 수 있다. 책이 아니라, 내 삶에서 실시간으로 혹은 미래에 일어나는 무수히 많은 실제 케이스에서도.
‘사람을 앎’
사람을 안다는 건, 지식을 아는 것과 큰 틀에선 일면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르고 어려운 문제다. 그 사람이 과거로부터 어떤 기억과 경험에 의해, 어떤 내적/외적 알고리즘과 습관이 생겼고, 그래서 현재와 미래에 어떻게 느끼고 행동할 지 예측이 어느정도 가능해야 한다. 이것이 그 사람을 아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의외로 사람은 꽤 오랜 과거의 몇몇 부정적 트라우마, 긍정적 카타르시스, 결핍의 기억 등등에 의해 주물에 녹인 쇠를 붓듯 형틀이 잡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안다는 건, 소요되는 시간이 짧든 길든 꽤나 세심한 노력과 애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한 가지,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언제나 예측값을 벗어날 수 있다는 한계 역시 인정해야 한다. 이 버퍼까지 고려했을 때, 사람을 ‘알게 되었다’라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