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 꺼내놓았을 때 사람들이 좋아하고 열광하는 어떤 특징이나 밑천이 ‘골방'에 혼자 틀어박혀 몸부림친 시간에 비례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 골방은 여러가지 동기와 맥락을 갖는다.
도피, 항상성, 감정의 쓰레기통, 휴식, 살벌하게 나를 마주하는 자체법정 기타 등등.
부모도, 가족도, 연인도, 학교나 직장도, 친구도. 잠시 눈 뜨고 일어날 때까지의 눈깜짝할 새에 손바닥 뒤집듯 뒤집히는 그 변수들의 향연이 지겹다. 변수라서 변하는 건 당연한데, 매번 그렇게 변하는 것 자체와, 아프게 변하는 건, 매번 그렇게 놀랍고 아프다. 그리고 그렇게 매번 놀랍고 아픈 것에 질린다. 매번 신선한 그 광경의 반복이 지겨워서 질리고, 거기에 지쳐서 질린다.
그래서 가끔, 혹은 하루에 짧게라도 잠시, 골방으로 도피한다. 나를 제외하고 나를 흔들 수 있는 모든 변수를 차단. 완벽한, 능동적이고 선택적인 고립. 변수(variable)가 아닌, 상수(constant)의 세계. 그리고 해서는 안 될 생각, 해서는 안 될 말, 해서는 안 될 짓거리들을 신나게 널브러뜨린다. 감정의 배출과 쓰레기통의 단계. 상대나 상황에 대한 배려, 스스로에 대한 자기검열조차 내려놓은, 완벽한 그 자체로 날것의 감정들. 그리고 그렇게 토하듯 뱉어낸 조각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음미하고 읽는다. 스스로에게도 숨겼던 그것들을 제대로 마주하는 시간. 마지막 과정은 정말 귀찮고, 스스로에게 쪽팔리고 짜증난다. 하지만 마지막 과정을 생략하면, 골방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그저 한껏 참았다가 냅다 싸지르고 끝나는, 말 그대로 쓰레기통일 뿐. 나는 나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나에게 입력되고 투영되며, 내가 소화한 내 주변의 세계를 발견해야 한다. 거기서 내가 얼마나 혼란스럽거나, 비겁했거나, 저열했거나, 고통스러웠는지. 부끄럽지만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걸 받아들이는 나 혹은 주변의 세계라는 두 변수중 하나를 고쳐서 부조리 혹은 불일치를 해결할 수 있다.
이 과정들은 의식적으로 일어나기도,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당연히 표현하는 방식이나, 그 때 소일거리나 마중물 삼아 하는 행위들도 다 다르다. 누군가는 글을 쓰고, 누군가는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하고, 누군가는 음악을 듣거나 책을 보고, 누군가는 멍하니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누군가는 울거나 웃고. 추가하자면 노래를 귀터지게 틀어놓고 아무도 안 보는 데서 춤을 추는 사람도 있다.
그런 과정에서 소일거리나 마중물처럼 쥐고 있던 행동들이 쌓이면, 아이러니하게도 그 골방의 몸부림이 언젠가 빛날 재료로 재활용될 가능성을 갖는다. 엄격하게 구분하자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인 겉치장이나 무기와는 다르다. 그런 겉치레들은 분명 그 얕은 밑천이 언젠가 티를 내고야 만다. 혹은 목적을 다하고 나면 급격하게 잊거나.
나의 골방. 나의 골방은 주로 음악과 글을 직접 찍어내거나 보는 것들이다. 언젠가 취업하기 직전의, 세상이 끝날 것처럼 공연만 하고 돌아다닐 때였다. 200명이 채 안 되는 사람 사이에, 공연했던 밴드 세 개와 스텝, 관객이 섞여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공연 수익은 대관료와 악기 세팅값을 빼고 나면 대부분 뒷풀이로 퉁치거나 간신히 용돈이 남을 정도였다. 그날도 수익이랍시고 뒷풀이에 돈을 퍼부으면서 놀고 있었다. 라이브 카페 사장이 배경음악으로 틀어놓은 노래들이 들렸다. 역시나 개버릇 남 못 준다고, 맨날 악기만 쥐고 놀던 사람들이니, 놀때도 배경음악에 맞춰서 스멀스멀 즉흥으로 연주를 하고 놀았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사장이 배경음악을 줄여버린다. 그 뒤로는 그냥 신청 들어오는 아무 노래나 치고 논다. 언제까지 악보 안 보고, 알듯말듯한 노래를 즉흥으로 안 틀리고 재연할 수 있는지 보자는 느낌의 서커스놀이. 그러게 본 공연시간만큼을 또 즉흥연주로 놀면서, 중간중간 맥주를 홀짝거리다 보면 날이 새 있었다. 뒷풀이가 끝나고 택시를 잡거나 첫차를 기다리다보면, 항상 그때까지 남았던 스텝이나 관객들이 하는 소리가 있었다. 그런걸 어떻게 즉흥으로 두세시간씩 하냐고. 뭐가 나올줄 알고 어떻게 준비하는 거냐고. 그런 얘기를 들으면, 우리는 재밌음 반, 씁쓸함 반으로 웃었다.
공연을 준비하면서 일상을 사는 멤버들과의 단톡방은 항상 대부분의 병신같은 소리와 갑툭튀한 센치하고 철학적인 명제나 논쟁들로 뒤덮였었다. 각자 학점 따려고 공부, 돈 벌려고 과외, 가족들에게 최소한의 외교적인 제스처(...), 그런 일상들을 마치고 나면 달이 휘영청 떴다가 넘어가고 있는 새벽 한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누군가는 레포트나 논문을 쓰고 있고, 또 누군가는 방에 불을 다 꺼놓고 병맥 하나를 까고서는 눈싸움 하는 사람도 있었다. 각자의 골방타임. 그게 30분이거나 밤새이거나, 그래서 누가 반응을 몇십분만에 하든 아침까지 답이 없든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각자 다른 분량과 방식으로 골방에 쳐박혀있어도, 손에 쥐고 있는 건 모양만 다르고 어차피 다 악기였다. 낮에 좋아하는 여자애랑 걸어가다가 어떤 가게 앞에서 들은 노래가 맘에 들었는데, 백그라운드에 깔린 피아노나 베이스 라인이 맘에 안 들었던 게 계속 거슬렸다. 그 노래를 틀고 내멋대로 라인을 얹으면서 그 장면을 회상한다. 낮에 파생상품론 프로젝트를 하다가 도저히 그 외계어같이 생긴 MIT 천재들의 공식을 이해하지 못한 머리가 짜증났었다. 그 때 굳은 머리를 좀 굴려보겠다고 들었던 시끄럽고 복잡한 연주곡이 떠오른다. 좋은 뇌운동 곡이었던 건 고마운데, 묘하게 따라치기 어려운 게 어그로가 끌린다. 어차피 이런 노래를 연주할 일도 거의 없고, 지금 당장은 내 방에 쳐박혀있으니 누구 보라고 치는 것도 아니지만. 저걸 넘어보고 싶다. 각자의 손버릇에 따라서 항상 넘어지고 꼬이는 부분은 과속방지턱처럼 턱턱 진행을 막는다. 어차피 쇠 줄 너댓개와 사람 손 열 개라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다. 왜 쟤는 되고 나는 안 되는 걸까. 실력이라는 것 외에 핑계는 없다. 남의 인정이나 보기 좋은 모양새 혹은 듣기 좋은 예쁜 소리라는 건 필요없다. 저 노트에 맞는 소리를 찍어내고, 그게 익숙해지면 저 쫀득쫀득한 그루브까지 내 껄로 만들어버리고 싶다. 그렇게 오전수업 직전에 몇 시간 정도 잘시간을 제외하고는 몸부림 몸부림 몸부림.
속썩이는 여자친구를 네 번이나 참다가, 속상하다고 티를 한 번 냈을 뿐인데, 겁이 난 건지 미안해서인지 이틀째 증발해서 답이 없다. 가족행사만 있다 하면 학교/과외/공연 셋중에 하나의 핑계로 빠져버린다고 신나게 나를 욕하는 부모가 싫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하고 사는 걸까. 속을 썩이지 말고, 미리 얘기를 하지. 이것도 다 내 잘못인가. 갑자기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이 시멘트 벽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아는 코드중에 모든 슬픈 마이너 세븐, 리디안 스케일, add9을 다 얹어서 서너개만 무한으로 치고 멍을 때린다. 표현인지 소화인지 위로인지 모를 시간들이 그렇게 흐른다. 그러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고, 손이 벌겋게 달아오를쯤이 되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 이거 소리 되게 예쁘잖아'.
누군가는 재능충들의 비싼 취미, 혹은 관종들의 인기관리 스킬, 여자 후리는 스킬이라고 신나게 씹어댔던 그 취미의 그런 면들. 그것들은 사실, 우리의 가장 누추한 골방에서 켜켜히 쌓여있던 시간들의 잔재였다. 그렇게 오랜시간을, 누가 보든말든 불 꺼놓고 술 마시면서 밤새 쳐도 안 틀릴정도로 주무르고 있었으니. 툭 치면 나오는 게 당연했다. 그만큼 스스로 짜내서 소화할 게 많은, 예민하고 쪼잔하고 치사한 놈들이어서 그랬다.
참 아이러니하다. 남들이 좋아할 그런 특징들은, 누추한 골방에서 나왔다는 것.